지혜롭지만 결단성이 부족했던 한신

 

중국 역사에서 한신의 이름은 실로 유명하다. 한고조 유방조차 그와 비교하면 손색을 느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왜 그런가?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은 세가지 관점에서 살필 수있다.

 

첫째는 전기적 색채가 짙은 한신의 일생 때문이다. 그는 일반 백성이었는데, 초기에는 가난에 시달리느라고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우울하게 보냈다. 심지어 참수까지 당할 뻔했는데, 나중에 시운(時運)이 바뀌어서 소하를 만나자 비로소 자신의 재주를 펼칠 수 있었다. 그와 관련된 사건으로 다른 사람의 다리 사이를 기어서 지나갔던 일, 빨래하는 아줌마가 밥을 주던 일, 소하가 달밤에 한신을 쫓아간 일 등은 이미 삼척동자도 다 알고 있는 이야기다. 둘째는 그가 유방의 미움을 사게 되어서 여후에게 죽임을 당했기 때문인데, 그 비극적 운명이 사람들로 하여금 애석한 마음을 금할 수 없게 하는 것이다. 셋째는 그가 망설이면서 결정을 내리지 못하다가 왕으로 자칭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쳐버린 것인데, 그 일은 천하에 뜻이는 영웅들의 마음을 태웠기 때문이다.

이상 세가지 이유 중에서 세 번째 이유는 중요한 것 같지 않지만, 실제로는 바로 그 이유때문에 다른 두 원인도 비로소 각광을 받게 된 것이다.

한신은 무엇 때문에 왕이 되지 못하였는가? 무엇 때문에 참수를 당했는가? 무엇때문에 후세의 영웅들에게 그토록 끊임없는 유감을 자아내게 하였는가?

 

   기원전 203년 10월, 유방은 항우를 공격하였다. 한신은 군사를 거느리고 동쪽으로 나아가서 조(趙), 연(燕) 두 나라를 평정하고, 다시 군대를 이끌고 동쪽으로 더 진군해서 제나라를 공격했다. 대군이 평원도(平原渡) - 지금의 산동성 서북부 - 에 이르렀을 때, 한신은 한왕(漢王)이 유세객 역이기(酈食其)를 제나라에 보내서 이미 제왕(齊王) 전광(田廣)을 한나라에 귀순하도록 설득했다는 보고를 들었다.

   한신은 그 보고를 듣고 이렇게 생각했다.

   '대부 역이기가 이미 제나라를 설득했다면 내가 무엇을 바라고 가겠는가, 군대를 이끌고 돌아가서 한왕을 도와 초왕이나 공격해야겠다.'

    그리하여 그는 군대를 그 자리에 주둔하도록 명하고는 날짜를 택해서 돌아가려고 했다. 이때 한신의 모사 괴통(蒯通)이 그래서는 안 된다고 만류했다. 한신이 물었다.

   "제왕이 이미 귀순하였다고 해서 내가 돌아가려고 하는데, 어찌하여 그래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이오?"

   괴통이 답하기를

    "장군은 명령을 받들고 제나라를 공격하러 왔습니다. 이런저런 곡절을 거쳐서 이제 제나라의 국경에 이르렀죠. 지금 한왕이 역이기를 제나라의 사신으로 보내서 입만 벙긋하는 것으로 제나라를 설득했다고 하는데, 그것이 진실인지는 아직 의문입니다. 하물며 한왕께서 아직 장군에게 아무런 명령도 전하지 않은 상황인데, 어찌하여 전해지는 말만 믿고 갑자기 돌아갈 수 있겠습니까? 또한 역이기는 일개 유생으로서 세치 혀끝으로 제나라의 70여 개 성곽을 공략했지만, 장군은 수만 명의 정예군을 거느리고도 1년 남짓을 싸운 뒤에야 겨우 조나라 50여 개 성곽을 공략했으니, 장군으로 몇 년을 지낸 자가 일개 유생보다 못한 판국인데 아무런 준비도 없는 틈을 타서 곧장 쳐들어가 제나라를 점령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 공은 장군의 것입니다."

   한신이 그의 말을 잠깐 되새겨보니 과연 일리가 있었다. 그러나 또한편 제나를 공격하면 역이기를 해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다시 말했다.

   "그대의 말에 일리가 있지만, 내가 그렇게 하면 제나라는 반드시 역이기를 죽일 것이오. 나는 결코 그렇게 하지 못하겠소."

   괴통이 그의 말에 웃으면서 답하기를,

   "장군은 실로 은덕을 잘 지키십니다! 장군은 역이기의 입장을 생각해주고 있지만, 제가 알기로 역이기는 스스로 자원해서 제나라 설득에 나섰다고 합니다. 그는 장군이 군대를 이끌고 제나라를 공격할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행하였으니, 그가 먼저 장군을 어긴 것이 아닙니까?"

   한신은  괴통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느꼈다. 그는 벌떡 일어나서 즉시 군대를 동원하여 평원하(平原河)를 건너 역하(歷下)로 쳐들어갔다. 제나라 군사는 아무런 방어도 하지 않고 있다가 졸지에 패배를 당했다.

   한신은 그 기세를 몰아서 제나라 장수 전해(田解)를 죽이고 화무상(華無傷)을 생포했다. 그리하여 한신은 매우 순조롭게 임치(臨淄)의 성문 앞에 이르렀다.

   제왕 전광은 원래 역이기의 설득으로 한나라에 귀순하기로 했다. 그런데 갑자기 한나라의 군사가 공격해온다는 소식을 듣자 급히 역이기를 불러서 호통을 쳤다.

   "내가 너의 말을 듣고 전쟁을 피할 수 있을까 했더니, 네 놈이 다른 꿍꿍이를 꾸몄구나, 겉으로는 나를 권고하는 척하면서 군대를 철수하도록 하고, 속으로는 암암리에 한신의 군사를 불러들여서 나의 왕국을 전복하려 하다니, 그 죄는 실로 죽어 마땅하다."

   역이기가 대답하기를,

   "한신이 군사를 거느리고 온 것은 제나라가 귀순한 소식을 몰라서 그런 것입니다. 이제 대왕께서 저와 함께 사신을 동행시켜서 한신을 찾아가도록 해주십시오. 제가 반드시 한신이 군사 공격을 멈추고 제나라에서 물러가도록 하겠습니다."

   그러자 옆에 서 있던 제나라의 재상 전횡(田橫)이 외쳤다.

   "그렇게 되면 네가 벌써 멀리 도망쳤을 텐데, 어찌 또 네놈에게 속겠는가!"

   그리고는 역이기가 변명할 사이도 없이 그를 끓는 기름 가마에 넣겠했다.

   기원전 203년 11월, 한신은 용차(龍且)와 제왕 전광의 목을 베고 제나라를 평정했다. 이때 그는 군사 수십만을 거느리고 있었는데, 그 실력은 당시 아주 대단한 것이었다.

   그때의 상황에서 한신이 한나라를 떠나서 초나라에 귀순하면 한나라가 멸망하고, 한나라를 도와서 초나라를 공격하면 초나라가 멸망하며, 스스로 왕이 된다면 천하가 셋으로 나뉠 형편이었다. 그리하여 초나라와 한나라는 그를 매우 중시했다.

   당시 초나라와 한나라의 대치는 아주 심각한 상태에 처해 있었다. 한신은 항우가 세운 제나라를 격파한 후에 다른 사람의 권고를 듣고서 유방에게 사자를 파견하여 자신을 제나라의 가왕(假王)에 봉해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자 유방은 매우 분노하였다. 자신의 형세가 매우 위급한 상황인데 한신이 군사를 이끌고 와서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이 기회에 자신을 협박하여 제나라 왕이 되려 한다고 여겼던 것이다. 그리하여 유방은 한신이 보낸 사자를 혼내주려고 했다. 그러자 그의 모신(謨臣) 장량이 조용히 타일렀다.

   "지금은 한신의 사자를 훈시하지 말아야 할 뿐만 아니라 한신을 공격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지금 한신이 대왕을 돕는다면 초왕이 멸망할 것이고, 만약 한신이 대왕을 배신하고 초왕을 돕는다면 대왕께서 위험에 처하게 됩니다. 한신이 사람을 보낸 것은 대왕의 마음을 떠보려는 것일뿐입니다. 그러니 아예 그를 제나라 왕으로 봉해주어서 제나라를 지키도록 하는 편이 낫습니다. 다른 일은 초나라를 멸한 후에 다시 논의해도 됩니다."

   유방은 장량의 말에 따라서 한신의 사자에게 말했다.

   "대장부가 왕이 되려면 진짜 왕이 되어야지, 어찌 가짜 왕(假王)이 되겠느냐!"

   그리하여 이듬해 2월, 장량으로 하여금 옥새가 찍힌 편지를 갖고 제나라로 가서 한신을 제왕으로 봉하도록 했다.

   한왕 유방이 한신을 제왕으로 봉하자 한신은 흔쾌이 그 책봉을 받았다. 후에 초왕 항우가 사자 무섭(武涉)을 한신에게 보내서 초나라에 귀순하도록 권햇으나 한신은 한사코 사절했다.

   괴통은 한신을 설득해서 한나라에 등을 돌리도록 하려 했다. 그래서 그는 한신을 만나서 이렇게 말했다.

   "제가 요즘 관상술을 배우고 잇는데, 그대의 얼굴을 보면 제후에 불과한 상이지만, 등을 보면 말할 수 없이 고귀한 상입니다."

   한신은 그의 말 속에 뼈가 있는 것을 간파하고 얼른 그를 밀실로 데리고 가서 물었다.

   "금방 한 말은 무슨 뜻인가?"

   괴통이 대답했다.

   "애초에 여러 영웅들이 도처에 일어날 때, 유능한 인재들이 모인 것은 진(秦)나라를 멸하기 위한 것이었죠. 그런데 진을 멸한 후 초나라와 한나라가 천하를 다투느라고 백성들이 고생을 하고 있습니다. 항우는 팽성에서 군사를 일으켰는데, 남북을 오고 가면서 형양(滎陽)까지 쳐들어가 천하에 그 위세를 자랑했죠. 지금은 광무(廣武)를 에워싸고 있는데, 몇해 동안 아무런 진척도 없는 상태입니다.

   한편, 한왕은 수십만 대군을 거느린 채 산과 강에 의지하여 하루에 몇번씩 싸움을 벌이고 있지만 아무런 공도 이루지 못하고 실패를 거듭하고 있습니다. 제가 천하의 대세를 살펴보니, 현자가 나서지 않고는 이러한 싸움이 끝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장군이 이때 초와 한 사이에서 어느 한쪽을 돕는다면, 그 쪽이 반드시 이기게 됩니다. 다라서 초와 한 두 왕의 목숨은 지금 장군의 손에 달려 있는 것이나 다름없지요.

   저의 계책을 말씀드리자면, 어느 쪽도 돕고 있지 않다가 때가 되면 천하를 셋으로 나눈다는 것입니다. 장군께서는 강성한 제나라 땅을 차지하고 연나라와 조나라를 격파하였으며 수십만 대군까지 보유하고 있으니, 시기가 성숙된 후에 서쪽으로 진군해서 백성들을 위해 명령을 수행한다면, 천하에 어느 누가 복종하지 않겠습니까?

   장차 천하를 할거해서 제후들에게 분봉하면 모두 제나라를 따를 것이니, 그렇게 되면 패왕의 대업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신이 듣건대, 하늘에서 주는 것을 취하지 않으면 천명을 어기는 것이라서 반드시 벌을 받게 되고, 시기가 성숙되었을 때 행하지 않는다면 그때를 잘 이용하지 못하는 것이라서 화를 입게 된다고 합니다. 장군께서 부디 깊이 생각하셔서 좋은 기회를 버리지 않도록 하십시오."

   한신은 그의 말을 듣고 한참 후에야 비로서 대답했다.

   "한왕이 나를 매우 후하게 대해주는데, 어찌 이익 때문에 은공을 저버릴 수 있겠소?"

   괴통은 한신이 충의와 은혜에 매인 것을 보고 말했다.

   "월나라의 대부 문종(文鍾)은 망국의 땅에 남아서 구천을 위해 공을 세우고 이름을 날렸지만 결국 살해되었으니, 실로 토끼를 잡은 다음에 사냥개를 삶는 격이라고 하겠습니다. 장군의 충성과 신의는 아무래도 월나라의 대부 문종을 넘어서지는 못할 겁니다!

   제가 듣건대, 장수의 용맹이 임금을 놀라게 하면 위험을 자초하는 것이고, 공로가 천하를 진동하면 초나라든 한나라든 모두 두려움을 느껴 믿지 않으려고 하는 형편입니다. 그렇다면 어디에 몸을 의탁하겠습니까?"

   한신은 그이 말에 일리가 있다는 걸 인정하면서도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그리하여 괴통에게 다시 이렇게 말했다.

   "선생은 다시 말하지 마시오. 내가 깊이 생각해본 후에 결정을 내리도록 하겠소."

   괴통은 한신의 마음이 동한 것을 보자 작별하고 돌아갔다.

   괴통이 돌아간 후에 한신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

   '내가 항우를 위해 일할 때는 관직이 겨우 낭중(郎中)에 지나지 않았고 지위는 집극(執戟)에 지나지 않았다. 게다가 나의 말은 인정을 받지 못하고 제안한 계책은 하나도 채용되지 못했다. 그러나 한나라에 귀순한 후에 한왕은 나를 장군으로 임명하여 수만 명에 달하는 군사를 거느리도록 했으며, 입을 것, 먹을 것을 걱정 없도록 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이제 또 나를 제왕으로까지 봉하지 않았는가, 내가 이 은공을 배신한다면 반드시 상서롭지 못할 것이다. 또 내가 위표(魏豹)를 생포하고, 조나라와 연나라를 격파하고, 제나라까지 멸하였으니, 이처럼 큰 공로라면 한왕 또한 나를 어쩌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생각한 한신은 괴통의 제안을 거부하기로 마음먹었다.

   괴통은 한신을 큰 뜻을 품은 자로 여겼기 때문에 며칠 동안 조용히 기다렸다. 그러나 아무런 소식이 없자 다시 한신을 찾아가서 말했다.

    "장군께서 하루 속히 결정을 내리시기 바랍니다. 시기는 오래 가지 않고, 기회는 다시 오지 않습니다."

   이때 한신은 이미 한왕을 등지지 않기로 결심하였으므로 그 자리에서 대답햇다.

   "선생은 다시는 그러한 말을 하지 마오. 내 공로가 적지 않고 또 한왕에게 충성하고 있으니, 한왕은 반드시 나를 해치지 않을 것이오!"

   이 말을 들은 괴통은 더 이상 권유해보았자 소용이 없다는 걸 알고 물러갔다. 한신과 작별한 괴통은 더 머물러 있다가는 화가 닥칠까 두려워서 미친 자로 가장하여 어디론가 가버렸다.

   기원전 197년 9월, 대상반(代相反)이 스스로 대왕(代王)으로 호칭했다. 한고조 유방은 군사를 거느리고 직접 정벌에 나서기로 했다. 수도를 떠나기 전에 그는 내부의 일은 여후에게, 외부의 일은 소하에게 일임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여후는 계책으로 한신을 붙잡아서 왕궁 옆에 딸린 종실(鍾室)에서 참수했다.

   죽기 전에 한신은 하늘을 향해 길게 탄식하며 말했다.

   "내가 괴통의 말을 듣지 않다가 오히려 여자의 속임수에 떨어졌으니, 이 어찌 천명이 아니겠는가?"

   반란군을 평정하고 돌아온 유방은 한신이 이미 처형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지나간 일이라고 묵인해버렸다.

   그는 한신이 죽기 전에 괴통을 언급했다는 말을 듣고는 특별히 사람을 보내서 괴통의 거처를 찾도록 했다.

 

역사의 시각에서 본다면, 물론 군벌(軍閥)간의 혼전도 반대해야 하고, 한신이 왕이 되어야 한다는 것도 반대해야 한다.

   그러나 개인의 관점에서 볼 때 상황은 전혀 다르다. 다른 것들은 그만두고 단순히 개인의 지혜만 보더라도 유방이나 항우는 한신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한신이 왕으로 자립해서 세 사람이 천하를 다툰다면 그 결과는 예측하기 어렵다. 하지만 한신이 성의(誠意)로 한왕을 대하고 도덕으로 정치를 대한다며느 그 결과는 미리 알 수 있는 것이다.

   한신은 결단성이 부족하고 전체적인 국면을 총괄하지 못했으니, 이 때문에 장수의 재능에 그친 것이 아니겠는가!

  1. 홍현식 2017.04.21 11:02

    psunicon@naver.com
    초대장 부탁합니다.
    블로그는 열씸해볼려는데
    티스토리가 좋다고 추천하더라구요....
    불타는 맘으로 할려합니다.
    초대장 꼭 부탁합니다.

  2. 2017.06.15 14:30

    비밀댓글입니다

  3. 희망빛 2017.10.16 08:53

    한신 아쉽네요 결단력의 중요성을 느낍니다

    • BlogIcon 미리수 현쭌아빠 2017.10.24 16:54 신고

      결과론적이지만 한신이 결단을 내렸으면 한나라가 천하를 통일하지 못했을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한신은 자기가 영리하고 뛰어난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수 도 있고요.
      그래서 유방이 자기를 어떻게 하지를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겠지요.

  4. 2018.01.11 09:53

    비밀댓글입니다

  5. 한석준 2018.03.17 01:04

    안녕하세요 글 잘봤습니다.
    죄송스럽지만 제가 과제로 인해서 티스토리에 가입을 해야하는데
    초대장 한 번 받을 수 있을까요. speld94@naver.com입니다.
    부탁드립니다.

이상한 말이지만, 중국 사람들은 누구나 권모술수가, 심지어 정치가로 태어난 것 같다. 출신이 비천하고 아무런 특징도 여인이 황후가 된 후에는 신하들을 능가하는 지모가 잇따라 나오고, 수많은 전쟁터에서 백만대군을 무찔렀던 장군조차 안중에 두지 않고 손 안의 노리갯감처럼 대하였다.

그 여인은 중국에서 사실상 황제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어떤 면에서는 후세 사람들에게 높은 평가까지 받고 있다.

 

   유방과 여치 사이에는 이상한 인연이 있었다고 한다. 유방이 사수(泗水)의 정장(亭長) - 진(秦)나라 때의 군현제에서는 현(縣) 밑에 향(鄕), 향 밑에 정(亭)을 설치했다. 정장의 정(亭)의 치안과 소송 등을 담당한 관리이다. - 으로 지내고 있을 때, 그의 친구 소하가 찾아와서 같이 한담을 나누게 되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선보현(單父縣)에서 원수를 피하여 현령을 찾아온 여씨(呂氏)라는 사람이 있다는 말을 꺼내게 되었다.

   현령은 여씨와의 친분 때문에 모든 관리들이 찾아와서 여씨가 온 걸 축하하도록 명령했다. 그 사연을 들은 유방이 말했다.

   "귀한 손님이 왕림하셨으니 가서 축하를 해야지."

   소하는 그가 농담하는 것으로 여기고 그대로 넘겼다.

   그런데 축하를 하는 날이 되자 유방은 곧 연회석을 찾아갔다. 소하는 마침 대기실에서 여씨를 위한 예물을 받고 있었다. 그는 유방이 오는 것을 보자 일부러 큰 목소리로 말했다.

   "진상한 예물이 천 냥이 되지 못한 사람은 당하(堂下)에 앉으시오."

   소하의 말을 들은 유방은 자신의 명함에다 '축의금 만 냥'이라고 적어서 건네주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한 냥도 갖고 있지 않았다.

   여씨는 유방의 축의금이 특별히 많은 것을 보자 황급히 마중 나와서 그를 상좌에 모셨다. 여씨는 관상술에 능한 사람이었다. 그는 유방의 거북 같은 등과 넓은 가슴, 그리고 일각(日角) - 이마 한가운데 뼈가 튀어나온 것을 말하며, 이는 관상에서 귀인상이라 여긴다 -  등을 보자 더욱 그를 공경했다. 소하는 유방이 돈을 갖지 않은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옆에서 비웃었다.

   "유씨는 언제나 큰소리만 칠 뿐 아무런 준비도 없구나."

   여씨는 소하의 말을 분명히 듣고도 유방에 대한 태도를 바꾸지 않았으며, 연회가 시작되자 유방을 상좌에 청했다.

  유방은 아무 것에도 상관치 않고 단지 먹고 마시는 일에 여념이 없었다. 연회가 끝날 무렵 여씨는 유방에게 남으라는 눈짓을 보냈다. 돈 한푼 없었지만 유방은 당황하지 않고 남았다. 여씨가 물었다.

  "제가 생김새가 특이한 사람을 평소에 많이 보았는데, 어느 누구도 당신을 따를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혹시 부인이 있으십니까?"

   유방이 아직 미혼이라 대답하자, 여씨는 매우 솔직하게 말했다.

   "저의 슬하에 딸이 있는데, 당신의 아내로 주고 싶소. 부디, 제 뜻을 저버리지 말기를 바라오."

   유방의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호박이 넝쿨째 굴러들어온 격이라서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큰 인사를 올렸다.

   나중에 여씨의 부인이 남편에게 푸념을 했다.

   "당신은 늘 우리 딸이 귀한 신분이 될 관상이라고 하면서 숱한 부자들에게도 시집보내지 않더니, 결국 유방과 같은 가난뱅이에게 보내려고 그랬습니까?"

   여씨가 대답했다.

   "유방은 귀한 사람이 될 관상이니, 후에 반드시 모든 사람들의 머리에 올라앉게 될 것이오."

   그리하여 여씨의 딸 여치는 유방과 부부의 연을 맺게 되었다.

   유방이 의병을 일으킨 후에 여치와 어린 두 자식이 모두 감옥에 감금된 적이 있었다. 다행스럽게 소하와 감옥 관리들의 도움으로 석방될 수 있었는데, 후에 여치는 자식을 데리고 망산과 탕산 사이에서 유방을 찾아내어 줄곧 그와 함께 있었다.

   유방은 팽성에서 항우에게 패하여 홀로 도망쳤는데, 그이 부친과 여치는 항우에게 붙잡혔다가 나중에 석방되었다. 그러므로 유방과 여치는 실로 환난을 같이 한 부부라고 할 수 있다. 유방이 황제가 된 후에 여치는 황후가 되었고, 여치가 낳은 아들 영(盈)은 태자에 책봉되었다. 그러나 여치와 태자의 지위는 매우 엄중한 도전과 시련을 받았다.

   유방은 팽성에서 패배하자 홀로 도망을 치면서 어느 민가에 들어갔다. 집주인은 유방이 한왕(漢王)이라는 말을 듣자 자기 딸을 주었는데, 그녀가 바로 척부인(戚夫人)이다. 항우를 격파한 뒤 유방은 척부인을 맞아들이더니, 점차 여후(呂后)- 여치-를 멀리하고 척부인만 총애했다.

   척희(戚姬)는 젋고 예쁜데다가 가무에도 능하고, 문장과 서예에도 어느정도 조예가 있었다. 더구난 유방을 아껴주고 아부도 잘했기 때문에 유방은 완전히 그녀에게 푹 빠져 있었다.

   유방의 사랑을 독차지한 척희는 자신의 미래를 위해서 자기가 낳은 아들 여의(如意)를 태자로 삼아달라고 여러 번 유방에게 요구하였으나, 유방은 끝까지 응낙하지 않았다. 이 일로 척희가 가끔 울고불고하자 유방의 마음도 조금씩 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태자 유영(劉盈)의 성격이 너무 나약해서 유방의 마음에 썩 들지 않았다. 하지만 여의는 총명하고 굳건한데다 그 생김새도 유방을 빼닮아서 유방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다. 결국 유방에게 유영을 폐하고 여의를 태자로 봉할 마음이 생겼으니, 그렇게 해야만 한나라의 왕실도 보존하고 총애하는 척희의 소원도 들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여후는 이미 그러한 낌새를 알아차리고 늘 전전긍긍하면서 지냈다. 하지만 유방의 몸과 마음이 전부 척희에게 쏠려 있었기 때문에 접근할 기회가 없어서 속만 태우고 있었다.

   마침 여의가 만 10세가 되었다. 관례대로 한다면, 그 역시 책봉을 받아서 영지로 가야 했다. 척희는 이 소문을 듣자 대경실색했다. 왜냐하면 일단 영지로 가게 되면 황제를 만나기 어렵게 되어서 아침저녁으로 황제를 가까이 하는 일은 전혀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자연히 감정도 멀어지게 되어서 당연히 황제의 환심을 살 수가 없었다.

   척희는 유방을 만나자마자 땅바닥에 주저앉아서 통곡하기 시작했다. 유방은 이미 그녀의 속셈을 알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말했다.

   "여의가 영지로 가야 하는 일 때문에 울고 있는 건가? 나 역시 여의를 태자로 봉하고 싶지만, 맏아들을 폐하고 둘째를 세우거나 적자를 폐하고 서자를 봉한다는 것이 아무래도 명분에 맞지 않아서 말을 꺼내기가 어려우니 좀더 기다려 보아야겠다."

   그러나 척희가 더욱 슬프게 울면서 애걸하자 유방의 마음도 조금 움직였다. 그래서 이튿날 대신들이 모인 장소에서 이 일을 의논하겠다고 응낙했다. 이튿날 아침 대신들이 모두 조회에 모이자, 유방은 태자를 폐하는 일에 관해 말을 꺼냈다. 그러자 대신들은 모두 놀라면서 태자를 봉한 지 여러 해가 되었고 또 전혀 과오를 범하지 않았는데도 아무런 이유 없이 태자를 폐한다면 천하가 어지러워질 거라고 했다. 그러나 유방은 그들의 의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조서의 초안을 담당한 관리에게 글을 작성하도록 명령했다.

   이때 어사대부 주창(周昌)이 앞으로 나서면서 단호하게 안된다고 외쳤다. 주창은 말을 더듬는 경향이 있었는데, 상황이 급하면 급할수록 말을 빨리 하지 못했다. 한참 후에야 그는 겨우 몇 마디 말을 내뱉었다.

   "신이 언변이 좋지 않지만, 이, 이, 이 일이 옳지 않다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폐하께서 태자를 폐하는 것은 절대로 불, 불, 불가합니다."

   유방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 결국 폭소를 터뜨렸고, 그 자리에 모인 대신들도 모두 소리를 내어 웃었다. 이 웃음으로 유방은 오히려 노기가 말끔히 사라지면서 다시는 조서를 작성하라고 재촉하지 않았다.

   주창이 동쪽 사랑문 앞에 이르렀는데 여후가 그곳에 서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다가가서 인사를 하려 하자, 뜻밖에 여후가 갑자기 그이 앞에 꿇어앉았다. 주창은 어찌할 바를 몰라서 덩달아 황급히 꿇어 앉았다. 여후가 얼른 그를 부축해 일으키면서 말했다.

   "오늘 만약 당신이 도리를 따지지 않았다면 태자는 벌써 폐해졌을 것이오. 내 자식의 태자 지위를 지킨 것에 감사하기 위해서 이렇게 큰 인사를 드리는 것이오."

   주창이 황망히 대답했다.

   "공적인 이유로 그렇게 말한 것이지, 개인적인 이익을 위해서 말한 것이 아닙니다. 황후께서는 너무 심려하지 마십시오."

   실제로 여후의 행위는 주창에 대한 감격의 뜻을 표현하는 것이 목적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여후가 일부러 연출한 것이기도 했다. 그녀는 이런 행동을 함으로써 대신들에게 태자를 함부로 폐해서는 안 됨을 강조한 것이다. 그러나 여후는 유방이 일시적으로 그 일을 중지하긴 했지만 시기가 되면 또다시 태자의 문제를 논할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스스로 태자의 지위를 고수할 방책이 떠오르지 않아, 장량을 끌어들여서 그로 하여금 좋은 대책을 고안하도록 했다. 장량이 말했다.

   "만약 유능하고 명성이 높은 사람들을 불러서 태자를 보좌하게 한다면, 태자가 유능하고 인심을 얻는 것처럼 보이므로 황제가 설사 폐할 마음이 있다고 해도 신중히 고려하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그렇게 되면 태자의 지위를 보전할 수 있을지도 모르죠."

   여후가 그런 유능한 인재들이 어디에 있느냐고 묻자, 장량이 이렇게 대답했다.

 

   "섬서(陝西)의 상산(商山) 일대에는 나이가 많은 네 명의 은사(隱士)가 있다고 하는데, 사람들은 그들을 '상산사호(商山四皓)라고 합니다. 황제께서 여러 차례 위임장을 보냈으나 그들은 모두 거절하였죠. 만약 그 사람들을 청할 수 만 있다면 아마 가능할 것입니다."

   여후는 즉시 사람을 보내서 그 '상산사호'를 청해오도록 했다.

   유방은 영포(英布-경포)등의 반란을 평정한 후에 심신이 너무 피로한데다 화살에 맞은 상처까지 도져서 병석에 누웠다. 척희는 밤낮으로 유방의 곁에 붙어서 시중을 들었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만약 유방이 세상을 떠나면 자기 모자의 생명을 지킬 수 있는 만반의 대책을 마련해달라고 졸랐다. 유방은 아무리 생각해도 별 다른 대책이 없는지라 다시 태자를 폐하는 문제를 꺼내게 되었다.

   장량은 태자의 소부(小傅)라서 소문을 듣자마자 즉시 유방을 찾아가 갖가지 도리를 내세워 만류하였으나 유방은 전혀 들어주지 않았다. 장량이 유방을 따른 이래로 유방은 그 계책을 거의 다 받아들였다. 그런데도 유방이 이렇게 나오자 장량은 간언의 어려움을 알고 병을 핑계로 두문불출했다.

   태자의 태부(太傅) 숙손통(淑孫通)은 그 소식을 듣고는 직접 궁내로 들어가서 이렇게 직언했다.

   "옛날 진헌공(晉獻公)이 총애하던 여희가 태자를 폐한일로 인해 진나라가 20년 동안 혼란에 빠져 있었습니다. 진시황은 부소를 미리 태자로 봉하지 않아서 진나라를 멸망으로 이끌었으니, 이 사건은 폐하도 친히 목격했던 바입니다. 여후와 폐하는 환난을 함께한 부부입니다. 자식이라고는 태자 하나뿐이고, 태자가 너그럽고 효성스럽다는 것은 천하가 다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아무런 이유도 없이 태자를 폐하려고 합니까? 만약 저의 간언을 받아들이지 않고 그래도 행한다면 저는 죽음으로 끝까지 간하겠습니다."

   말을 마친 숙손통은 즉각 검을 빼서 자살하려고 했다. 유방은 급히 그를 제지하면서 말했다.

   "나는 단지 말로만 했을 뿐이지, 진짜 그렇게 하려는 것은 아니네"

   얼마 지나지 않아 유방은 태자를 불러 함께 식사를 했는데, 사실은 그의 허실을 한번 떠보려는 것이었다.

   상산사호는 그 말을 듣자 태자를 동반하여 함께 궁궐로 들어갔다. 유방은 태자 뒤에 앉아 있는 수염과 눈썹이 백설 같은 네 노인을 보자 매우 이상한 생각이 들어서 누구냐고 물었다. 네 노인이 하나하나 자신의 성명을 말하자, 유방은 경악을 감추지 못하면서 물었다.

   "내가 몇 년 동안 당신들에게 임무를 맡기려고 했는데, 나의 초빙에는 응하지 않고 이제 내 아들과 교제하는가?"

   그러자 상산사호가 일제히 대답했다.

   "폐하께서 선비들을 얕잡아보고 멋대로 모욕하셨는데, 우리는 그런 처사를 참을 수 없기 떄문에 응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제 태자께서 마음이 어질고 선비들을 예의로 대한다고 하니, 천하의 현명한 자들이 모두 태자를 모시려고 하면서 태자를 위해 죽음까지 마다하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 몇 사람도 먼길을 마다하지 않고 특별히 찾아와서 태자를 보좌하려고 합니다."

   유방은 그들의 대답을 듣고 탄식을 그치지 않았다.

   태자와 상산사호가 떠나가자, 유방은 급히 척희를 불러서 상산사호의 뒤를 가리키며 말했다.

   "내가 여의를 태자로 봉하고 싶지 않은 것이 아니라, 태자의 깃털이 이미 풍성해져서 폐할 수가 없구나."

   척희는 유방의 말을 듣자 희망이 없음을 깨닫고 그 자리에서 기절할 듯이 몸부림쳤다. 유방도 마음이 매우 쓰려서 척희를 위해 [홍곡(鴻鵠)이 놓이 날아가네]라는 사(辭)를 높이 읊었는데, 그 소리 또한 처량하기 그지없었다.

 

   상산사호를 이용해서 태자의 명망을 높이려는 장량의 술수는 그가 독창적으로 창안한 것이 아니라, 이미 [전국책]에 연나라 소대(蘇代)가 순우곤(淳于髡)을 이용하여 제나라 왕을 설득한 예가 기록되어 있다. 소대는 백락(伯落)의 예를 들어가며 순우곤에게 제나라 왕에게 자신을 중용할 것을 권유해달라고 부탁했고, 제나라 왕은 그 말에 따라 소대를 신임하였다고 한다.

   이것은 비록 종횡가들이 지어낸 하나의 이야기에 불과하지만, 정치에서는 오히려 매우 잘 통용되는 것이었다. 여하튼 이후로 유방은 두번 다시 태자를 바꿀 생각을 하지 않았다.

   유방이 죽은 후 유영이 즉위하여 혜제(惠帝)가 되었는데, 실제로는 여후가 대권을 장악하였다. 그녀는 유씨의 세력을 배척했는데, 무엇보다도 먼저 눈엣가시처럼 여기던 척희를 냉궁(冷宮)에 집어넣었다. 여후는 척희의 삼단 같은 머리를 빡빡 밀도록 명령했다. 그리고 그녀의 머리와 목에 무쇠 고리를 두르게 하고, 왕궁의 의복대신 자홍색의 굵은 올로짠 허름한 옷으로 바꿔 입혀서 쌀 찧는 일을 시켰다. 척희는 평생 쌀을 찧어본 적이 없는지라, 가슴에 치밀어오르는 비분을 억제하지 못하고 매일 눈물 속에서 고된 나날을 보냈다.

   얼마 후 그녀는 스스로 [춘가(春歌)]를 지었는데, 바로 매일 쌀을 찧으면서 만들어낸 것이다. 그 내용은 이러했다.

 

아들은 임금이요 어미는 포로구나.

종일 쌀을 찧으며 저녁을 맞으니, 늘 죽음과 동반하는 것 같네.

서로 3천 리나 떨어졌으니, 누구를 시켜서 너에게 알리리.

 

   여후는 그 일을 알자 크게 화를 내면서 욕설을 퍼부었다.

   "비천한 계집이 아직도 감히 아들에게 기대를 걸고 있단 말이냐?"

그리하여 기원전 194년 여후는 사람을 보내서 조은왕(趙隱王) 여의를 독살하게 했다. 여후는 척희의 아들을 죽인 후로 더욱 잔인하게 척히를 박해했다. 먼저 척희의 손가락과 발가락을 모두 자르고 또 그녀의 유방을 도려냈다. 아울러 두 눈을 파내고 귀를 멀게 만들었으며, 목소리가 나지 않게 하는 약을 먹인 후에 변소에 가두었다. 여후는 척희에게 '인간돼지'라는 별명을 지어주었다.

   며칠이 지난 후 여후가 혜제를 불러서 이 광경을 보게 했는데, 혜제는 그녀가 누구인지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 그래서 옆에 있던 자가 척희라고 알려주었다. 이튿난 척희는 죽었다.

   혜제는 척희의 처참한 광경을 보고는 궁중에 들어와 울음을 그치지 못하였는데, 그 때문인지 1년 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후에 그는 여후에게 이렇게 말했다.

   "척희를 그 모양으로 만들었으니 어디 사람이 할 짓입니까? 내가 당신의 아들이지만 도저히 천하를 다스릴 수 없습니다."

   그후 한혜제는 종일토록 술과 여색에 빠져 지내면서 정무를 완전히 폐했다. 이렇게 소극적이고 퇴폐적인 날을 보내던 그는 기원전 188년에 우울하게 죽었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무기는 여자의 질투라고 했지만, 여후가 척희를 질투하여 저지른 복수는 아마 세상에서도 전무후무한 것이리라. 이는 전형적으로 중국적인 것이었다. 중국의 여인들은 천성이 특이해서 그런지 그녀들의 권모술수는 항상 잔인함과 관련을 맺고 있다. 여후는 동성의 라이벌에 대해서도 잔인하였을 뿐만 아니라 남성에게도 절대로 연약함을 보이지 않았다.

   한나라 초기, 천하가 안정을 찾기는 했지만 인심은 아직 통일되지 않았다. 특히 일부 군사 대권을 쥐고 있는 장수들이 천하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기 때문에 유방은 매우 조심하면서 지냈다. 그가 반란군 진희(陳豨)를 진압할 때도 궁중의 일은 여후에게 맡기고 궁중 밖의 일은 소하에게 위임한 후에야 비로소 마음을 놓고 떠났다. 여후는 실로 속셈이 있는 여인이었으니, 그녀는 권위를 세우고 세력 기반을 굳힐 수 있는 것이라면 사소한 기회도 놓지지 않고 앞날을 위해 토대를 닦았다.

   유방은 한신이 모반하는 것이 아닌가 의심을 했기 때문에 그의 지위를 강등시키면서 장안에 머물게 했다. 바로 이때 한신의 사인(舍人)인 난설(欒設)이 남동생을 보내서 한신이 진희와 내통하여 이미 밀약을 맺은 상태라는 보고를 올렸다. 즉, 야밤을 이용하여 감옥 문을 열어서 범죄자들을 풀어주고, 태자를 습격해서 진희와 호응하기로 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여후는 소식을 접하자 즉시 소하와 상의하여 한신을 제거하기로 했다. 여후는 심복 군졸을 유방이 보낸 군사로 위장시키기 위해서 일단 장안을 빠져나간 뒤에 다시 북쪽 장안으로 들어오게 했다. 그리고는 '진희는 이미 죽었다'는 소문을 퍼드리게 했다.

   대신들은 그 내막을 모르고 모두 조정에 나와서 축하를 했다. 여후의 본뜻은 이 기회에 한신을 궁중으로 유인하려는 것이었는데, 한신은 몸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축하하러 오지 못했다. 어쩔 수 없이 소하가 찾아가보기로 했다.

    소하가 자신의 집을 찾아오자, 한신은 마지못해 나와서 그를 영접하였다. 소하가 한신을 보고 별로 병도 없는 것 같다고 했기 때문에 한신은 어쩔 수 없이 소하를 따라서 조정에 나갔다. 하지만 그는 미처 축하를 하기도 전에 체포되었다. 한신은 사태가 좋지 않은 걸 알아채고 급히 소하를 부르면서 구원을 청했으나 소하는 이미 멀리 피한 상태였다.

   무사들이 한신을 여후의 면전으로 끌고 갔다. 여후는 난설이 보내온 서신을 증거로 한신의 모반을 꾸짖었지만, 한신은 당연히 불복했다. 그러자 여후가 말했다.

   "진희가 이미 붙잡혔다는 황제의 조서가 왔는데, 이 속에는 그대와의 밀약이 있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또 그대의 사인이 밀고한 서신도 있으니 증거가 확실하다."

   여후는 이 일을 질질 끌다가는 다른 변수가 생길까 걱정해서 한신을 즉시 참수하도록 명했다. 이리하여 공훈이 혁혁한 개국의 원로는 억울한 누명을 쓴 채 여후의 칼에 죽임을 당했다.

   소하가 한신을 발탁해서 대장이 되도록 했고 또 계략으로 그를 체포해서 죽임을 당하게 하였으니, 그야말로 '성취한 것도 소하 때문이요. 망한 것도 소하 때문이라는' 격이다. 소하의 이런 행위는 바로 그때그때의 형세에 따라서 나온 것이었다. 유방에게 인재가 필요할 때 한신을 불러들였고, 유방이 '토끼를 다 잡아서 사냥개가 필요 없게' 되고 여후가 위엄을 세울 필요가 있게 되자 한신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그러니 장수가 되는가, 아니면 귀신이 되는가 하는 것은 모두 당시의 필요에 따른 것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소하라는 위인이 정직하지 못한 인물임을 알 수 있다. 그는 단지 지모에 능하고 조심성이 많으며 시세를 잘 파악해서 화를 피하는 권모술수가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여후는 한신을 죽이고도 성이 차지 않았는지 또 구실을 만들어 양왕(梁王) 팽월(彭越)까지 죽였다. 유방이 진희의 반란을 평정할 때 양(梁)땅에서 징병한 적이 있었는데, 마침 양왕 팽월은 병으로 드러누워 있어서 미처 유방을 찾아뵙지 못했다. 유방은 크네 노하면서 팽월에게 모반의 마음이 있지 않은가 의심했는데, 마침 양태복(梁太僕)이 팽월에게 모반의 뜻이있다고 보고하자 유방은 그를 즉시 체포하게 했다. 조사와 심문을 해본 결과 팽월이 반란을 평정하는 일에 적극적인 반응을 보이지는 못했으나 모반의 마음은 없었다는 것이 판명되었다. 하지만 유방은 그를 서인(庶人)으로 낮추고 낙양의 궁중에 감금했다가 나중에 다시 촉(蜀)땅에 이주하도록 했다.

   팽월이 서쪽으로 가다가 정(鄭) 땅에 이르렀는데, 마침 장안에서 낙양으로 가던 여후를 만났다. 실로 팽월은 죽을 운명이었다. 그는 자신의 무죄를 울면서 호소하며 고향인 창읍(昌邑)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청했다. 여후는 한번 방법을 생각해보겠다고 하면서 그를 낙양으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 암암리에 사람을 시켜서 팽월이 모반하려 한다고 모함하도록 사주한 후에 그것을 구실로 팽월을 낙양성 밖에서 죽였다. 뿐만 아니라 그의 3족까지 멸해서 그 후환을 깨끗이 제거했다.

   여후가 왕후(王候)의 신분을 가진 두 공신을 죽이자, 대신들은 깜짝 놀라서 여후를 다시 보게 되었다. 여후는 그 기회를 틈타서 세력 기반을 어느 정도 구축했다. 그녀가 개국 공신들을 죽인 것은 장차 대권 장악이라는 원대한 목표를 실현하는 데 장애가 되는 인물들을 제거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행위는 동시에 그녀의 정치적 야심을 여지없이 드러냈다. 유방은 일찍이 이 점을 간파했다. 그래서 자신이 죽은 후에 유씨 정권이 무너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대신들과 백마의 피를 마시며 이러한 서약을 했다.

   "만약 유씨의 종족이 아닌 자가 왕이 된다면, 천하 사람들이 합심하여 그 자를 토벌하라!"

   유방이 죽은 후 유영이 혜제로 즉위 하였으나, 그는 너무 나약해서 국가의 대권은 사실상 여후에게 돌아갔다.

   얼마 후 유영은 여후의 작간(作奸)에 놀라서 죽었다. 여후는 이 친자식밖에 없었기 때문에 궁녀가 낳은 유공(劉恭)이라는 사내애를 왕위에 올려 놓고 그의 생모는 죽여버렸다. 이렇게 해서 여후가 직접 모든 권력을 장악하는 상황이 이루어졌다.

   여후가 통치하는 8년 동안, 그녀는 유씨 종족이 아니면 왕이 될 수 없다는 규율을 개고 여씨 일족을 대거 책봉하였다. 그리하여 여대(呂臺)를 여왕(呂王)으로, 여산(呂産)을 양왕(梁王)으로, 여록(呂祿)을 조왕(趙王)으로, 여통(呂通)을 연왕(燕王)으로, 그의 여동생 여수(呂須 - 번쾌의 처)를 임광후(臨光候)로 각각 봉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이때쯤 유씨 정권은 이미 여씨 정권으로 전락되어 있었다.

   유공은 점차 나이가 들면서 자신이 여후의 친자식이 아니란 것을 알게 되었다. 언젠가 육공이 이런 말을 했다.

   "태후가 어찌 나의 생모를 죽이고 나를 황제로 올려놓을 수 있단 말인가? 내가 장성한 후에는 반드시 복수 할 것이다."

   여후는 그 말을 듣자 즉시 그를 연금했고, 얼마 후에는 그를 폐하고 살해했다. 그 다음 왕위에 오른 항산왕(恒山王) 유홍(劉弘)은 완전히 꼭두각시 황제였다.

   기원전 180년 7월, 여후는 중병에 걸렸다. 그녀는 대신들이 자기에게 복종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며, 그래서 자기가 죽은 후에는 반드시 커다란 혼란이 일어날 것을 에감하고 있었다. 그녀는 여씨 일족에게 미리 군사적 준비를 갖추도록 하는 한편 이렇게 당부했다.

   "내가 죽은 후에 대신들이 반란을 일으킬 수 있으니, 나의 장례식으로 인해 왕궁을 비우지 말라. 다른 사람이 왕궁을 장악할 수 있기 떄문이다. 그리고 병권을 완전히 장악해서 황궁을 굳게 지켜야 한다."

   바로 그 달에 여후는 병으로 죽었다. 한나라의 개국 공신 주발(周勃)과 승상 진평(陳平) 등은 다른 장수들과 함께 여씨 이족의 혼란을 틈타서 일거에 그들을 제거하여 모조리 죽였다. 그리고 유항(劉恒)을 추대하여 한문제(漢文帝)로 삼았다. 결국 여후가 온갖 고심을 하면서 이루려고 했던 여씨 정권은 철저히 파탄이 나고 말았다.

 

여후는 황제의 명분은 갖추지 못했으나 황제의 실속은 챙겼으니, 중국 역사에서 첫 여성 황제라고 할 만하다. 그녀는 8년 동안 집정하면서 백성들에게 휴식을 주는 여러 가지 정책을 시행함으로써 어느정도 사회의 안정과 발전을 이룩했다. 이 점에서 그녀에게 일정한 업적이 있다고 보아야 할것이다.

   일반 백성에서 시작하여 황제라는 지존(至尊)의 위치까지 오른 여성은 중국에서 여후가 유일하다. 그녀의 일생을 살펴보면, 기회와 개인의 노력이 절반씩 차지하였음을 알 수 있다. 앞의 절반은 유방의 아내이자 고귀한 신분인 황후로서 다른 사람과 견줄 수 없는 우위를 말하는 것이고, 뒤의 절반은 자신의 우세함에 의지해서 장기적으로 들인 노력과 강인하고 잔인한 수단을 가리킨다. 같은 황제의 아내로서 척희는 사실상 여후보다 더 많은 우위를 점하고 있었지만, 그 우위를 이용하지 못하고 단지 유방을 조르기만 하다가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하지만 여후는 안과 밖을 아울러 공격하고 강함과 부드러움을 겸용한 수단으로 자신의 위엄을 확립해서 대신들을 제어했다.

   여후의 일생을 살펴볼 때, 성공의 비결은 사실상 교활하고 잔인한 데 있었다. 중국 봉건시대의 궁정은 아마도 도리와 도덕을 가장 무시하는 곳일 것이다. 그런 이유로 일반적인 상황에 빗대어서 조금이라도 인정을 갖게 되면 그 자리에서 패배하게 된다. 권력을 위해서는 물질, 도덕, 감정 등 어떠한 대가를 지불하는 것도 마다하지 말아야 하고 일체의 양심을 어기고 살아야 했다.

   궁정 안의 투쟁에서 권력욕과 인성(人性)이 겨루는 경우가 종종 발생하는데, 대체로 권력욕이 승리하고 인성이 패배하게 된다. 실패자의 수급을 살펴볼 때 우리는 그나마 미미한 인성을 느낄 수 있지만, 승리자의 미소를 바라볼 때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권력욕뿐이다.

 

 

 출처 : 위키디피아, 수호전 삽화

 

 

중국에는 이런 속담이 있다.

  "어릴 때는 '수호전'을 읽지 않고, 나이가 들어서는 '삼국지'를 읽지 않는다."

말하자면 혈기왕성한 젊은 시절에 '수호전'을 읽으면 쉽게 난을 일으킬 우려가 있으며, 나이 든 사람은 연륜과 속셈이 깊은데 만약 '삼국지'까지 읽는 다면 쉽게 간교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사실 책략가라고 해서 반드시 간사한 자라고 할 수는 없다. 삼국시대의 순유가 바로 그러한 책략가이다.

 

 

   순유(荀攸, 157~214)는 자(字)가 공달(公達)인데, 후한 말엽 영천(潁川) 사람이다. 그는 사족(士族)출신으로 위인이 선량하고 단정할 뿐만 아니라 지헤가 풍부했다. 순유는 어릴 적에 부모를 여의고 조부와 숙부 아래서 자라났는데, 외모는 우둔하고 나약했으나 실제로는 아주 영리하고 용감했다.

  순유가 13세때에는 조부 순담(荀曇)이 죽자, 과거 그의 수하에 있던 장권(張權)이라는 관리가 스스로 찾아와서 그 분묘를 지키겠다고 자청했다. 순유는 숙부 순구(荀衢)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자는 얼굴 빛이 이상해서 아마 간교한 일을 저지를 것 같습니다."

순구는 그 말뜻을 알아차리고 그 사람에게 자세한 상황을 물었다. 과연 장권은 살인을 저질러서 도주하고 있던 중이었으며, 분묘를 지키는 일로 자신의 신분을 감추려고 했던 것이다. 이 일이 퍼지게 되자 사람들은 모두 순유를 괄목상대하게 되었다.

  나중에 순유가 조정에서 황문시랑으로 있을 때 동탁이 난을 일으켰다. 순유는 동탁 암살 계획에 참여했던 일로 감옥에 갇혔다가 동탁이 제거된 후에 비로소 출옥할 수 있었다.

  그는 황문시랑으로 있으면서 혼란한 세상을 안정시킬 수 있는 주인을 찾기 위해 애를 썼다. 조조는 한헌제(漢獻帝)를 맞이해서 허창(許昌)에 도읍을 정한 후에 순유가 능력 있는 사람이라는 소문을 듣고 그를 여남(汝南)태수로 임명했다가 다시 군사로 삼았다. 순유는 조조야말로 자신과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여기고 그와 함께 일을 추진했다. 조조는 순유를 얻게 되자 매우 기뻐하면서 사람들 앞에서 이렇게 치하했따.

  "순유는 비상한 사람이야! 내가 그 사람과 함께 대업을 도모할 수 있으니, 이제 천하에 걱정될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

이 말에는 순유에 대한 조조의 신뢰와 칭찬이 함께 들어 있었다.

처음 조조는 순유가 유능하다는 소문을 듣자 그를 초빙하려고 했다.

그래서 순유에게 이러한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지금 천하는 일대 혼란에 빠져 있으니, 지모가 뛰어난 사람들이 입신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요! 그대는 사람 중의 용봉(龍鳳)이므로 이 기회를 놓치지 말고 포부를 펴야 하오. 하지만 아직 형주(荊州)에서 관망만 하고 있으니, 너무 많은 기회를 놓치고 있는 것이 아니오?"

  순유는 조조가 자신을 인재로 간주하자 곧장 조조를 찾아가서 상서(尙書)가 되었다.

  역사의 기록에 의하면, 조조는 많은 책사를 두고 있었지만 그 중에서 가장 공로가 큰 책사는 순유였다. 조조를 보좌하는 과정에서 순유는 12차례나 큰 공로를 세웠는데, 모두 조조의 군사로 하여금 위험한 상황에서 살아나게 하거나 기술(奇術)로 승리를 거두헤 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순유는 조조가 모든 일을 상의하는 책사가 되었다.

  건안 3년(198년) 순유는 조조를 따라서 장수(張繡)를 정벌하러 나섰다. 순유는 당시의 형세가 조조에게 아주 불리한 것을 보자 이렇게 말했다.

  "장수는 유표(劉表)와 연합하여 우리와 맞서고 있습니다. 그들은 서로 호각지세를 이루고 있죠. 그러나 장수의 군대는 유표의 보급에 의지하고 있기 때문에 얼마 지나지 않아 유표는 점차 지탱하기 어렵게 될 것이며, 그렇게 되면 두 사람은 필연적으로 갈라설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성급히 공격하지 말고 관망하면서 그 변화를 지켜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적들을 유인해서 스스로 멸망의 길로 치닫게 할 수 있지만, 반대로 성급하게 공격을 한다면 유표가 반드시 결사적으로 지원할 것이니 아군은 쉽게 성공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궁지에 몰릴 위험이 있습니다."

  그러나 조조는 그의 권고를 듣지 않고 직접 장수와 전투를 시작했다. 과연 유표가 군대를 보내서 지원하자, 조조의 군대는 손해를 보았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조조 역시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 후에 조조는 이 일을 후회하면서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게 모두 순유의 말을 듣지 않은 결과이다!"

  얼마 후 조조는 적군을 유인하는 계책을 사용하고  나서야 비로소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이때부터 조조는 순유의 계책이라면 반드시 채택했을 뿐만 아니라 결코 경솔하게 그의 의견을 거부하지 않았다.

  건안5년(200년), 조조와 원소 사이에 유명한 관도(官渡) 전투의 서막이 올랐다. 이는 조조의 운명을 결정하는 전투였다. 2월, 원소는 먼저 대장 안량(顔良)을 보내서 백마(白馬)를 포위했다. 4월, 조조는 친히 군대를 거느리고 포위된 백마를 구하러 떠났다. 군사들이 행군 중에 있을 때 순유는 아군보다 훨씬 강대한 적군과 정면으로 충돌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당시의 형세를 분석하여 '동쪽을 치는 척하면서 서쪽을 공격하는' 성동격서(聲東擊西)의 전술로 백마의 포위를 구하겠다는 방안을 세웠다.

  순유는 일단 수적으로 우세한 원소의 병력을 분산시켜야겠다고 생각했기 떄문에 조조에게 먼전 연진(延津)으로 가서 강을 건너 원소의 후방을 공격하는 것처럼 꾸미게 했다. 그렇게 되면 원소가 군사를 나누어서 서쪽으로 보낼 터인데, 그때 다시 가벼운 장비로 무장한 정예군을 보내서 백마를 포위하고 있는 원소의 군대를 공격하면 안량을 격파 할 수 있다고 보았다.

  조조는 그의 계책을 듣자 그대로 진행하도록 했다. 과연 원소는 군사를 나누어서 연진으로 보냈으며, 조조는 그 기회를 틈타서 가벼운 기병을 보내어 연진을 습격했다. 결국 아무런 준비도 없던 안량은 관우에게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조조는 백마의 포위망을 격파 한 후에 기병 600명을 이끌고 강을 따라 서쪽으로 퇴각했다. 그러나 얼마 가지 못해서 5,6천명에 달하는 원소의 추격병과 조우했는데, 장병들은 적군과의 역량 차이가 너무 현저한 것을 보자 모두 겁을 먹고 있었다. 그러나 순유는 적들의 약점을 파악하고 있었던 지라 이렇게 말했다.

  "지금이야말로 적군을 격파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그런데 왜 퇴각하려 합니까?"

   조조는 순유와 마주보며 웃었다. 그들이 생각하는 바가 같았던 것이었다. 조조는 군사들에게 말안장을 떼어서 말을 풀어놓고 장비들을 곳곳에 어지럽게 던지게 했다. 바로 원소의 군대를 유인하려는 것이었다. 원소의 군대가 가까이 오자 그들은 길에 널려 있는 장비들을 곳곳에 어지럽게 던지게 했다. 바로 원소의 군대를 유인하려는 것이었다. 원소의 군대가 가까이 오자 그들은 길에 널려있는 장비들을 서로 가지려고 다투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때 조조는 맹렬한 공격을 가해서 원소의 군대를 크게 대하하고 대장 문추(文醜)를 사로잡았다.

  원소의 두 대장은 전사했고, 조조는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어서 그후의 발전을 위한 든든한 기반을 닦았다.

  당시 원소의 군대는 매우 강해서 조조의 군대보다 절대적인 우세를 확보하고 있었다. 그러난 원소는 결단력이 약하고 군사를 효율적으로 지휘하지 못했다. 특히 원소의 책사인 허유(許攸)가 원소의 억압에 화가 나서 조조에게 귀순했는데, 그는 원소의 군량과 그밖의 군수물자가 모두 오소(烏巢)에 집결되어 있으니 그곳에 불을 지르면 원소는 3일도 지나지 않아서 큰 혼란에 빠질 거라고 했다. 이 계책은 아주 절묘해서 순유도 구상은 하고 있었지만 원소의 허실을 몰라서 경솔히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순유는 허유의 말대로 오소를 습격하자고 제안했으며, 조조는 직접 군사를 이끌고서 오소의 진영을 크게 격파했으니, 이로써 중국 역사에서 유명한 관도의 전투는 첫 시작부터 조조의 승전으로 그 막을 열었다.

  원소는 오소의 군량이 모두 불에 타버리자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이때 순유가 조조에게 말했다.

    "지금 승리의 여세를 몰아서 추격할 수 있습니다. 먼저 가짜 소문을 퍼뜨려서 아군이 군사를 돌렸다고 하면서 한쪽으로는 산조(酸棗)와 업군(鄴郡)을 공격하는 것처럼 위장하고, 다른 한쪽으로는 여양(黎陽)을 공격하는 거처럼 행동함으로써 마치 원소의 퇴로를 차단하려는 것처럼 보이게 합니다. 원소는 이 소문을 들으면 워낙 의심 많은 성격이라서 필경 가짜로 진짜로 여기고서 군사를 분산시켜 아군을 공격할 것입니다. 그가 군사를 움직이는 틈을 타서 그의 군영을 기습한다면, 원소의 군대는 이미 투지가 떨어진 상태라 반드시 쉽게 격파할 수 있을 겁니다."

  조조는 순유의 말을 옳다고 생각해서 즉시 그의 계책에 따라 즉시 군사를 세갈래로 나누었다. 그리고 도처에 소문을 퍼뜨려서 원소를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원소의 수하들은 그 떠도는 소문을 듣고 이렇게 전했다.

  "조조는 군사를 두 갈래로 나누어서 하나는 업군으로 진군하고, 하나는 여양을 공격하려고 합니다."

  원소는 그의 정보를 그대로 믿고서 즉시 10만 대군을 급파하여 업군과 여양을 지원하게 했다. 조조는 즉시 많은 병력을 집중해서 그 허점을 노리고 원소의 군영을 기습했다. 원소의 군대는 싸울 마음도 없었기 때문에 군사들이 사방으로 흩어져서 전혀 저항할 여지가 없었다. 원소는 갑옷, 투구도 입지 못한 채 어린 자식 원상(袁尙)을 데리고 황급히 도망을 쳤으며, 조조의 군사는 그 뒤를 바짝 추격했다. 원소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금은, 재물, 도서, 수레 등을 모두 버리고 단지 기병 800여명만을 데리고 여양으로 도망했다. 마침내 이 전투에서도 조조의 군대는 전면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조조가 여포를 토벌할 때도 순유는 군사를 따라 나섰다. 여포는 조조의 군대와 유비 등이 협공을 하자 하비(下邳)에 움츠리고 있었다. 조조의 군대는 여러 차례 공격을 감행했으나 여포의 성곽을 공략할 수 없었다. 결국 군대가 어느 정도 피로해지자, 조조는 군사를 거두어서 완성(宛城)으로 돌아갈 마음을 먹었다. 그러나 순유는 단호히 반대하며 조조에게 이렇게 권했다.

  "여포는 비록 용맹하지만 지모가 없습니다. 이제 그는 세 번 싸워서 세 번 모두 패했기 떄문에 사기가 현저히 떨어져 있는 상태입니다. 비록 성곽을 지키고는 있지만 군사들은 이미 아무런 투지도 없으니, 만약 좀더 기다린다면 적군은 스스로 허물어 질 것입니다. 여포의 수하에 비록 진궁과 같은 책사가 있다고 하지만, 계책에 대한 구상이 늦기 때문에 형세의 변화에 맞추지 못하는 실정입니다. 지금 여포의 예기가 회복되지 못하고 진궁의 계책이 아직 확정되지 않은 이 틈을 타서 바짝 공격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면 여포를 반드시 격파 할 수 있습니다."

  조조는 일리가 있다고 여기면서 순유에게 다시 물었다.

  "어떤 좋은 방법이라도 있고?"

  순유는 다음과 같은 방안을 제시했다.

  "먼저 성벽을 파괴하고 나서 일거에 공격을 개시하면 됩니다."

  이리하여 조조는 군사를 지휘하여 기수(沂水)와 사수(泗水)의 물을 하비성에 들이대었다. 강물의 물살이 성벽을 파괴하자, 여포의 군대는 싸움도 하지 않고 그대로 대패했다. 여포는 이 전투에서 생포되어 처형을 당했다.

  전투가 끝난 후에 조조는 자신이 완전히 순유의 계책에 따라 성공을 거두었다고 생각해서 연신 순유를 치하했다.

  "설사 안자(顔字)나 영무자(寧武字)와 같은 옛날 성현들이 있었을지라도 이 정도에 불과했을 것이다!"

 

  원소가 죽은 후에 그의 몇몇 아들은 사욕으로 인해 서로 다투게 되었다. 건안7년(202년) 순유는 조조를 따라서 원담(袁譚)과 원상에 대한 공격에 참여해서 여양으로 갔다. 이듬해 조조는 또 유표를 공격했는데, 바로 이때 원담, 원상 두 형제 사이에 익주를 두고 내분이 일어났다. 동생을 이기기 위해서 원담은 조조에게 귀순을 조건으로 자신을 지지해 달라고 제안했다. 조조는 책사와 대신들을 모아놓고 이 일을 의논하게 했는데, 대부분의 의견은 먼저 유표를 격파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했다. 그리고 원담, 원상은 단합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늘 서로 다투고 있으며, 또 지모에도 능하지 않은데다가 장수나 책사의 보좌도 없으니 크게 우려할 바가 아니라고 했다. 그러나 순유만은 그들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유표 부자는 마치 돼지나 개처럼 스스로의 문 앞만 지키려고 할 뿐이지 천하를 정복하겠다는 포부는 품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천하가 혼란에 빠져서 할 일도 많은 시점인데, 어찌하여 떡 버티고 가만히 있겠습니까. 원소는 과거에 4주(州)를 점령하고 정예군 10만명을 보유한 적이 있기 때문에 그 기반이 아주 탄탄할 뿐만 아니라 오랫동안 통치한 지역에서는 민심도 그들에게 쏠리고 있습니다. 지금 그 들 두 형제가 서로 다투고 있으니, 이때야말로 우리가 그들을 격파할 절호의 기회입니다. 만약 우리가 원담의 투항을 거절해서 그를 궁지로 몬다면, 그는 다시 동생과 화해해서 부친의 사업을 이어갈 것이니 천하는 다시 고난에 빠질 것입니다.

  이제 그들 형제가 상잔(相殘)하고 양립할 수 없을 터인데, 한쪽이 다른 한쪽을 겸병한다면 그 세력이 그만큼 커지게 되어서 쉽게 대처할 수가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마땅히 그들 내부 분쟁의 기회를 틈타서 그들을 공격하여 천하를 평정해야 합니다. 결코 이 기회를 그냥 놓쳐서는 안됩니다."

  조조는 그의 말을 듣자 앞이 확 열리는 것을 느꼈다.

  "좋소, 그대의 의견대로 해봅시다."

  조조는 순유의 의견대로 원담의 요구에 응해서 군사를 보내 원상을 패배시켰다. 원상이 멸망한 후에 과연 순유의 추측대로 원담은 즉시 조조를 배반했다. 하지만 그의 세력은 이미 크게 약화되었기 때문에 순유와 조조는 남피(南皮)에서 원담을 죽였다. 익주를 평정한 후에 조조는 황제에 올리는 상서에서 이렇게 순유의 공로를 치하했다.

  "군사(軍師) 순유는 신을 보좌하면서부터 모든 전투에서 반드시 수행했으며, 신이 여러 강적을 격파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순유의 계책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조정에서는 순유를 능수정후(陵樹停侯)로 임명했으며, 나중에 조조는 위나를 건립한 후에 순유를 상서령(尙書令)으로 임명했다.

 

  조조는 순유를 중시했을 뿐만 아니라 그에 대해 높은 평가를 아끼지 않았다. 게다가 순유를 단지 지모가 출중한 사람일 뿐만 아니라 아주 충성스러운 자로 생각했다. 그래서 조조는 자신의 아들을 순유에게 부탁하기도 했는데, 그의 아들 조비에게 이렇게 충고했다.

  "순유는 인간으로서 모범이 되는 사람이다. 그러니 너는 예를 갖추어서 그를 깍듯이 대해야 한다."

  조비는 조조의 말을 명심해서 순유가 병상에 있을 때도 그 앞에 꿇어앉아서 문안을 드리는 등 마치 부친을 대하듯 그를 존경했다.

    건안12년(207년) 순유는 중군사(中軍師)가 되었고, 위나라가 갓 건립되자 다시 상서령이 되었다. 건안 19년(214년) 순유는 조조를 따라서 손권을 공격하러 나섰는데, 그 원정길에서 병 때문에 68세의 나이로 일생을 마쳤다.

  흔히 책략가는 마치 조조처럼 흰 얼굴을 한 악당으로 간주된다. 하지만 역사의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진정한 책략가는 어느 누구나 자신의 도덕적 수양을 쌓는 것 부터 시작하며, 그렇게 때문에 지모는 자연발생적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물론 본질적으로 말하자면, 이러한 지모는 단순히 일반적인 의미의 지모가 아니라 도덕적인 인격이 되는 것이다.

  실제로 책략의 깊은 본질은 바로 인격이니, 구체적인 인격을 떠난 소위 기술적인 '계략'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1. BlogIcon 타리 2016.11.20 19:28 신고

    삼국지 조조전온라인 게임공략을 올리면서 배경지식을 찾아보다가 글이 너무 좋아서 본문에 링크를 걸었습니다. 좋은 글 잘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혹시 링크를 원치 않으시면 알려주시면 삭제하겠습니다.
    http://qing.one/900
    (예약발행이라 목요일 업로드 예정입니다)

  2. BlogIcon 희망빛 2017.10.16 09:09

    저는 제갈량빠지만 조조가 한나라를 섬겼으면 하고 아쉽네요 순유 멋집니다

    • BlogIcon 미리수 현쭌아빠 2017.10.24 16:53 신고

      조조도 처음에는 한나라의 부흥이 목적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기존 체제를 유지하기에는 산적한 문제가 많다고 느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조조 생전에는 단지 한나라를 섬기는 위나라의 왕으로 만족을 하였던 것이고요.

 

유방

출처 : 위키디피아

 

 

장군의 재능을 갖춘자, 원수의 재능을 갖춘자, 패왕의 재능을 갖춘자, 이 세 종류는 성격이 같지 않는 재능이다.

어떤 자가 장군의 재능을 갖춘 자인가?

장군의 재능을 갖춘 자는 군사를 이끌고 적진으로 돌격해 들어갈 수 있고,

앞으로 나가면 승리하고 퇴각할 때는 질서가 있으며

아울러 책략에도 능해야 한다.


어떤 자가 원수의 재능을 갖춘 자인가?

원수의 재능을 갖춘 자는 뭇 장군을 통솔해서 그들을 지휘 할 수 있어야 하며,

마음속에 전체적인 국면을 담아서 깊이 생각하고 멀리 내다볼 줄 알아야 하며,

국난에 처했을 때 독자적으로 그 상황을 감당할 수 있어야 한다.


어떤 자가 패왕의 재능을 갖춘 자인가?

패왕의 재능을 갖춘 자는 시사를 꿰뚫어 보고 미래를 통찰 할 수 있어야 하며,

세상의 흐름을 파악하고 독특한 안목이 있어야 하며, 의연하고 굳셀 뿐만 아니라 인재를 발견하고 등용할 줄 알아야 한다.

 

 

 

      젊은 시절 유방(劉邦)은 착실하고 성실한 사람이기보다는 한량에 가까웠다. 아버지, 형과 함께 농사일에 전념하는 것이 아니라 늘 건들거리면서 놀기를 일삼았다. 아버지가 여러 번 권고했지만 끝내 그의 습관은 고쳐지지 않았다. 특히 유방(劉邦)의 형수는, 매일 좋은 것만 골라먹고 일은 조금도 하지 않는데다가 가산만 탕진하는 이 시동생을 탐탁지 않게 여겨서 불평이 대단했다. 이런 사정을 알게 된 유방(劉邦)의 아버지는 맏아들에게 따로 살림을 차리도록 하고 자신이 유방(劉邦)을 데리고 있었다.

유방(劉邦)은 스무 살이 되어서도 여전히 못된 습관을 고치지 못했다. 그의 아버지가 이렇게 나무랄 정도였다.

"너는 정말 건달이로구나! 어찌하여 형을 본받지 못하느냐? 그 아이는 살림을 차린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땅까지 사놓았다. 너는 언제 땅도 사고 집도 지겠느냐?"

   하지만 유방(劉邦)은 여전히 정신차리지 못했으며, 심지어 늘 건달 친구들과 함께 형 집에 밥을 얻어먹으러 갔다. 그의 형수는 화가 나서 유방(劉邦)을 꾸짖었으나 유방(劉邦)은 별로 개의치 않았다. 한번은 유방(劉邦)이 또 친구들과 함께 밥을 얻어먹으러 갔는데, 형수는 꾀가 나서 주방에 들어가 밥주걱으로 솥을 긁는 소리를 요란하게 냈다.그 소리를 들은 유방(劉邦)은 이미 식사때가 지난 것으로 생각하고 친구들을 돌려보냈다. 그런데 주방에 들어가보니 솥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고 있었다. 유방(劉邦)은 그때서야 형수의 장난인 줄 알고는 장탄식을 하면서 다시는 형 집을 찾지 않았다.

 

 

항우(項羽)와 천하를 다툴 때 유방(劉邦)은 팽성에서 크게 패아여 홀로 도망가게 되었다. 당시 그는 자신의 두 자식도 잃어버린 상태였다. 유방(劉邦)은 며칠 동안 도주하다가 부하 하후영을 만나자 마음이 적이 놓였다. 다시 얼마 후 피난 가는 사람들 속에서 잃어버렸던 두 자식을 찾게 되자 더욱 마음의 위안을 느꼇다. 그런데 초나라 장수 계포의 추격병이 바로 들이닥칠 줄이야!

   유방(劉邦)은 황급히 도망가면서 수레가 너무 무거워 속도가 느리다고 나무라더니 두 아이를 수레에서 밀어내려고 했다. 하후영은  그 광경을 보고 얼른 그들을 수레에 도로 태웠다. 이렇게 하기를 세번을 반복하자, 유방(劉邦)이 그에게 호통을 쳤다.

"내가 지금 위급한데 어찌 두 자식까지 돌본단 말이냐! 스스로 목숨을 버리란 말이냐?"

하후영이 대답했다.

"이 아이들은 대왕의 친 혈육입니다. 어찌 버릴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자 유방(劉邦)은 발끈 화를 내면서 검을 빼들고 하후영을 내리쳤다. 하후영은 그 칼날을 피하는 한편 이번에는 아이들을 수레에 태우지 못하고 겨드랑이에 낀 채 말을 타고 유방(劉邦)을 따라서 도주했다.

 

 

   또 한번은 초나라와 한나라가 대치하고 있을 때, 항우(項羽)가 유방(劉邦)의 부친을 사로잡고서 유방(劉邦)을 협박한 적이 있었다. 양군이 대치하는 가운데 항우(項羽)는 유방(劉邦)의 부친을 진영 앞에 내세우고서 유방(劉邦)에게 말했다.

"만약 네가 철수하지 않는다면, 너의 부친을 이 자리에서 끓는 물에 삶겠다."

그러자 유방(劉邦)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우리 두 사람이 의형제를 맺었으니, 나의 아버지가 바로 너의 아버지이고 너의 아버지가 또한 나의 아버지가 아니겠느냐! 만약 내 아버지를 삶았다면 나에게 고기 국물이라도 좀 보내다오."

항우(項羽)는 도저히 유방(劉邦)을 협박할 수 없다는 것을 알자, 결국 유방(劉邦)의 부친을 석방하고 말았다.

유방(劉邦)이 천하를 통일해서 한왕조를 세운 후였다. 한번은 신하들과 함께 모인 연회석에서 유방(劉邦)이 자신의 부친에게 이렇게 물었다.

"아버지, 나와 형님 가운데 누구의 재산이 더 많을까요?"

하지만 그의 부친은 소인이 득세한 꼴을 보자 속이 뒤틀린 나머지 '흥'하는 콧방귀만 남긴 채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이처럼 유방(劉邦)은 건달에 무뢰한이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다른 사람과 견줄 수 없는 장점이 있는데, 즉 다른 사람의 의견을 잘 수용하고, 장수들을 훌륭히 단합시키며, 참을 줄 알고, 인재를 등용하는 재능이 있었다.

 

 

 

  한나라 왕조가 개국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떄였다. 유방(劉邦)은 한신(韓信)을 비롯해 다른 대신들과 함꼐 있는 자리에서 여러 장수들의 재능을 논하게 되었다. 유방(劉邦)이 한신(韓信)에게 이렇게 물었다.

"그대가 보기에 내가 백만 대군을 거느릴 수 있겠는가?"

한신(韓信)이 대답했다.

"거느릴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10만 대군을 거느릴 수 있는가?

"역시 거느릴 수 없습니다."

유방(劉邦)이 화가 치밀어서 물었다.

"그대가 보건대, 내가 몇명의 군사를 거느릴 수 있겠는가?"

"1만명을 거느릴 수만 있어도 대단한 것입니다."

"그렇가면 자네는 몇 명의 군사를 거느릴 수 있는가?"

한신(韓信)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저야 물론 많으면 많을수록 좋죠."

유방(劉邦)은 이상하기도 하고 분하기도 해서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왜 내가 황제가 되고 자네는 장군밖에 되지 못했는가?"

"폐하께서는 군대를 잘 거느리지는 못하지만, 장군들을 잘 이끌 수 있기때문이죠."

실로 유방(劉邦)은 '장막 안에서 천리 밖의 승리를 결정하는' 면에서 장량만 못하고, 양식과 말 먹일 풀을 운반해서 보급을 보장하며 나라와 백성을 다스리는 일에서 소하에 미치지 못하며, 전쟁터에 나가서 직접 군사를 지휘하여 적을 무찌르는 일에서 한신(韓信)을 따르지 못한다. 그러나 유방(劉邦)의 장점은 바로 이러한 사람들을 하나로 결집해서 그들 각자의 능력과 장점을 자신을 위해 살릴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유방(劉邦)은 그야 말로 '장수들을 잘 이끄는 데' 능수능란했으며, 한신(韓信)은 유방(劉邦)의 사람 됨됨이를 알면서도 그 손아귀를 벗어나지 못했다.

 

 

항우(項羽)가 패배한 후 그의 부장 종리매와 계포는 몸을 숨기기에 바빴다. 유방(劉邦)은 황제가 된 후 즉시 전국에 그들을 수배하는 현상 포고문을 내걸었다. 전국을 샅샅이 뒤지는 수색이 벌어지자, 종리매는 도망갈 곳이 없어서 고향 친구인 한신(韓信)을 찾아갔다. 한신(韓信)은 옛정을 생각해서 그를 초왕부에 숨겨주었다. 그런데 나중에 누군가가 이일을 유방(劉邦)에게 밀고하였고 그 사연을 들은 유방(劉邦)은 아연실색했다. 그는 줄곧 한신(韓信)을 경계하고 있었는데, 특히 한신(韓信)이  종리매를 숨겨주었다는 보고를 받자, 유방(劉邦)은 그에게 모반의 마음이 있는 것이 아닐까 의심하게 되었다.

그는 즉시 조서를 내려 종리매를 수도로 보내라고 한신(韓信)에게 명했다. 한신(韓信)은 조서를 받았으나 종리매를 차마 보내지 못하고 종리매가 이미 떠났다고 보고했다. 유방(劉邦)은 그 보고를 접하였지만 의혹이 가시지  않아서 사람을 파견하여 암암리에 감시하도록 했다. 한신(韓信)은 자신의 영지에 있을 때는 늘 군마를 데리고 출입하였는 데 그 위풍이 대단했다. 감시하던 자는 이런 상황을 유방(劉邦)에게게 은밀히 보고하면서 한신(韓信)이 모반할 마음이 있는것 같다고 했다.

유방(劉邦)은 즉시 장수들을 모아놓고 한신(韓信)을 대처할 방책을 강구하도록 했다. 모든 사람이 한신(韓信)을 징벌하지면서 유방(劉邦)에게 말했다.

"한신(韓信)이 난을 일으키면 폐하계서는 군사를 일으켜 징벌해야 합니다."

유방(劉邦)은 그 말을 듣고도 아무런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늦게온 진평에게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를 물었다. 진평은 한신(韓信)의 모반에 대하여 반신반의했지만 유방(劉邦)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그가 물었다.

"여러 사람들의 의견은 어떠합니까?"

유방(劉邦)이 대답했다.

"군사를 일으켜서 징벌하자고 하오."

"페하께서는 한신(韓信)의 모반을 어떻게 알게 되었습니까?"

"밀고한 사람이 있었네."

"그 밀고한 사람 외에 누가 또 한신(韓信)의 모반을 말합니까?"

"아직은 없네."

"한신(韓信)은 이러한 밀고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한신(韓信)은 모르고 있네."

"지금 폐하께서 보유한 병사로 한신(韓信)의 초병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자신이 없네."

"폐하의 장수들 중에서 한신(韓信)과 대적할 수 있는 자가 있습니까?"

"없네."

"지금 군사도 한신(韓信)의 초나라 군사보다 못하고, 장수 또한 한신(韓信)과 대적할 수 없는데, 만약 군대를 동원하여 징벌에 나선다면 한신(韓信)에게 모반할 마음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모반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유방(劉邦)은 그의 말이 옳다는 생각이 들어서 대책을 다그쳐 물었다. 진평이 잠깐 생각하다가 말했다.

 "신에게 계책이 한 있는데 폐하께서 가늠해보십시오. 옛날에는 천자가 순행을 나서면 반드시 제후들을 만나는 행사를 가졌습니다. 남쪽에 운몽택이란 유명한 명승지가 있다고 하니, 폐하께서는 운몽으로 유행을 떠난다고 하면서 천하 제후들을 진 땅을 불러들이십시오. 진 땅은 초의 서쪽 변경과 인접하여 있으니, 초왕 한신(韓信)은 폐하가 왕림하신다는 소문을 들으면 반드시 뵈러 올것입니다. 폐하께서는 그를 접견하는 자리에 무장한 복병을 매복해두었다가 그를 잡으면, 이 어찌 쉽게 일을 처리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유방(劉邦)은 진평의 계책에 따라서 즉시 사자를 파견하여 명했다.

"운몽택으로 유행을 가니 제후들은 모두 진 땅에 모이도록 하시오."

한신(韓信)은 유방(劉邦)의 명령을 받자 당연히 그 의도를 의심하게 되었다. 그는 두번이나 유방(劉邦)에게 병권을 박탈당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유방(劉邦)의 의심 많은 성격을 잘 알고 있었기 떄문에 매사에 각별히 조심했다. 이번에 유방(劉邦)이 갑자기 운몽택을 유행한다고 하는데, 만약 가지 않으면 임금과 신하의 예의에 어긋나게 되고, 만약 가서 만난다면 의외의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도 없는 처지였다. 한신(韓信)이 망설이는 모습을 보이자 부하들 중에서 이렇게 말하는 자가 있었다.

"대왕께서 종리매를 숨겨주느라고 임금의 명을 위반한 것 외에는 아무런 과오도 없지 않습니까? 따라서 종리매의 목을 베어서 그의 수급을 폐하에게 바친다면, 폐하께서는 매우 기뻐할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대왕께서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한신(韓信)은 그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종리매를 찾아가 이야기를 나누면서 자신의 난처한 입장을 쓸적 내비쳤다. 그이 말을 들은 종리매가 말했다.

"한이 초를 감히 공격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나와 당신이 연합해서 반란을 일으킬까 두려워하기 때문이오. 만약 내가 오늘 죽는다면, 내일은 당신이 반드시 나와 같은 운명을 겪을 것이오."

그래도 한신(韓信)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종리매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면서 한신(韓信)을 꾸짖었다.

"너는 큰 일을 이룰 군자가 아니다. 내가 너를 잘못보았구나!"

그리고는 검을 뺴어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한신(韓信)은 종리매가 죽은 것을 보자 그의 수급을 취한 뒤에 진 땅으로 유방(劉邦)을 알현하러 갔다.

유방(劉邦)은 사방으로  사신을 파견하고 나서 그들이 돌아오기 전에 낙양을 떠나 곧바로 진 땅으로 향하였다. 한신(韓信)은 진 땅에서 며칠을 기다렸다가 유방(劉邦)을 만나자 즉시 종리매의 수급을 바쳤다. 그런데 갑자기 유방(劉邦)이 호통을 쳤다.

"한신(韓信)을 잡아라."

그러자 행렬에서 많은 무사들이 뛰어나와서 한신(韓信)을 꽁꽁 묶었다.

한신(韓信)은 별로 놀라지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

"과연 사람들의 말대로 토끼가 죽으면 사냥개를 삶고, 높이 나는 새가 보이지 않으면 활을 거두며, 적국을 격파한 후에는 모신도 죽이는 겪이로구나. 천하의 임자가 정해졌으니, 나도 마땅히 죽을 떄가 되었었다."

유방(劉邦)은 그의 말을 듣고 말했다.

"네가 모반한다는 밀고가 있었으므로 너를 체포하는 것이다."

유방(劉邦)은 한신(韓信)을 수레 뒤에 실은 뒤에는 운몽택 유람이고 뭐고 모두 집어치웠다. 제후들에게도 오지 않아도 된다는 기별을 띄우고는 곧바로 낙양으로 돌와왔다.

  낙양으로 돌아온 유방(劉邦)은 한신(韓信)에게 과오보다는 공로가 훨씬 많았고, 게다가 모반에 대한 명백한 증거도 없었기 떄문에 그를 석방하면서 초왕에서 회음후로 지위를 낮추었다.

과거 초나라와 한나라가 전쟁을 할 떄 한신(韓信)이  항우(項羽)를 도왔더라면 항우(項羽)가 천하를 통일하게 되고, 한신(韓信)이 유방(劉邦)을 돕는다면 유방(劉邦)이 천하를 장악하게되며, 만약 한신(韓信)이 유방(劉邦)을 등지고 스스로 세력을 확장했다면 항우(項羽), 유방(劉邦)과 함께 삼국 정립의 형세를 이루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한신(韓信)에게는 당시 여러 차례 자립할 기회가 있었고, 뿐만 아니라 한신(韓信)에게는 당시 어려 차례 자립할 기회가 있었고, 주변의 사람들도 그에게 스스로 왕이 될 것을 권고했다. 하지만 그는 끝내 모든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한나라가 건립된 후에 한신(韓信)은 왕으로 책봉받기는 했지만, 내심으로는 섭섭함이 없지 않아서 '마음속에 원망을 품고' 있었다. 유방(劉邦)은 한신(韓信)의 그런 면을 예견했기 때문에 먼저 선수를 쳐서 그의 작위를 삭감하고, 다시 그가 갖고 있는 권력의 대부분을 해제하면서 그를 실제로 도읍에 연금했다. 얼마 후에 유방(劉邦)의 아내 여치가 소하와 은밀히 모의하여 한신(韓信)을 조정으로 유인한 후에 모반이라는 죄명으로 그를 포박하고 나서 무사를 시켜 그를 죽였다.

 

한신(韓信)은 장수의 재능을 갖춘 자이기는 하지만 패왕이 될자는 아니니, 이는 의심할 나위도 없는 사실이다. 유방(劉邦)은 '장수를 통솔하는 데' 매우 능해서 패왕이 될만한 자이지만, 다른 한편 건달이기도 했다.

유방(劉邦)은 한신(韓信)을 대할 때 덕이 아니라 술수로 통제하였다. 전통 사회에서 술수로 나라와 백성을 다스린 자는 쉽게 업적을 쌓았으나, 덕으로 나라와 백성을 다스린자는 오히려 성공하지 못한 경우가 있었다.

 

누가 인심을 얻어야 비로소 천하를 얻는다고 했던가?

건달, 무뢰한도 천하를 얻지 않았는가!

건달, 무뢰한은 무엇에 기대어서 천하를 얻었을까?

인재를 얻었기 대문에 그러한 성공이 가능했다!

 

 

대선 정국에 맞물려 다시 한번 생각하게하는 글이어서 올려봅니다.

지난 대선과 그리고 이번 대선 현명한 생각을 해야할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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