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말이지만, 중국 사람들은 누구나 권모술수가, 심지어 정치가로 태어난 것 같다. 출신이 비천하고 아무런 특징도 여인이 황후가 된 후에는 신하들을 능가하는 지모가 잇따라 나오고, 수많은 전쟁터에서 백만대군을 무찔렀던 장군조차 안중에 두지 않고 손 안의 노리갯감처럼 대하였다.

그 여인은 중국에서 사실상 황제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어떤 면에서는 후세 사람들에게 높은 평가까지 받고 있다.

 

   유방과 여치 사이에는 이상한 인연이 있었다고 한다. 유방이 사수(泗水)의 정장(亭長) - 진(秦)나라 때의 군현제에서는 현(縣) 밑에 향(鄕), 향 밑에 정(亭)을 설치했다. 정장의 정(亭)의 치안과 소송 등을 담당한 관리이다. - 으로 지내고 있을 때, 그의 친구 소하가 찾아와서 같이 한담을 나누게 되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선보현(單父縣)에서 원수를 피하여 현령을 찾아온 여씨(呂氏)라는 사람이 있다는 말을 꺼내게 되었다.

   현령은 여씨와의 친분 때문에 모든 관리들이 찾아와서 여씨가 온 걸 축하하도록 명령했다. 그 사연을 들은 유방이 말했다.

   "귀한 손님이 왕림하셨으니 가서 축하를 해야지."

   소하는 그가 농담하는 것으로 여기고 그대로 넘겼다.

   그런데 축하를 하는 날이 되자 유방은 곧 연회석을 찾아갔다. 소하는 마침 대기실에서 여씨를 위한 예물을 받고 있었다. 그는 유방이 오는 것을 보자 일부러 큰 목소리로 말했다.

   "진상한 예물이 천 냥이 되지 못한 사람은 당하(堂下)에 앉으시오."

   소하의 말을 들은 유방은 자신의 명함에다 '축의금 만 냥'이라고 적어서 건네주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한 냥도 갖고 있지 않았다.

   여씨는 유방의 축의금이 특별히 많은 것을 보자 황급히 마중 나와서 그를 상좌에 모셨다. 여씨는 관상술에 능한 사람이었다. 그는 유방의 거북 같은 등과 넓은 가슴, 그리고 일각(日角) - 이마 한가운데 뼈가 튀어나온 것을 말하며, 이는 관상에서 귀인상이라 여긴다 -  등을 보자 더욱 그를 공경했다. 소하는 유방이 돈을 갖지 않은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옆에서 비웃었다.

   "유씨는 언제나 큰소리만 칠 뿐 아무런 준비도 없구나."

   여씨는 소하의 말을 분명히 듣고도 유방에 대한 태도를 바꾸지 않았으며, 연회가 시작되자 유방을 상좌에 청했다.

  유방은 아무 것에도 상관치 않고 단지 먹고 마시는 일에 여념이 없었다. 연회가 끝날 무렵 여씨는 유방에게 남으라는 눈짓을 보냈다. 돈 한푼 없었지만 유방은 당황하지 않고 남았다. 여씨가 물었다.

  "제가 생김새가 특이한 사람을 평소에 많이 보았는데, 어느 누구도 당신을 따를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혹시 부인이 있으십니까?"

   유방이 아직 미혼이라 대답하자, 여씨는 매우 솔직하게 말했다.

   "저의 슬하에 딸이 있는데, 당신의 아내로 주고 싶소. 부디, 제 뜻을 저버리지 말기를 바라오."

   유방의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호박이 넝쿨째 굴러들어온 격이라서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큰 인사를 올렸다.

   나중에 여씨의 부인이 남편에게 푸념을 했다.

   "당신은 늘 우리 딸이 귀한 신분이 될 관상이라고 하면서 숱한 부자들에게도 시집보내지 않더니, 결국 유방과 같은 가난뱅이에게 보내려고 그랬습니까?"

   여씨가 대답했다.

   "유방은 귀한 사람이 될 관상이니, 후에 반드시 모든 사람들의 머리에 올라앉게 될 것이오."

   그리하여 여씨의 딸 여치는 유방과 부부의 연을 맺게 되었다.

   유방이 의병을 일으킨 후에 여치와 어린 두 자식이 모두 감옥에 감금된 적이 있었다. 다행스럽게 소하와 감옥 관리들의 도움으로 석방될 수 있었는데, 후에 여치는 자식을 데리고 망산과 탕산 사이에서 유방을 찾아내어 줄곧 그와 함께 있었다.

   유방은 팽성에서 항우에게 패하여 홀로 도망쳤는데, 그이 부친과 여치는 항우에게 붙잡혔다가 나중에 석방되었다. 그러므로 유방과 여치는 실로 환난을 같이 한 부부라고 할 수 있다. 유방이 황제가 된 후에 여치는 황후가 되었고, 여치가 낳은 아들 영(盈)은 태자에 책봉되었다. 그러나 여치와 태자의 지위는 매우 엄중한 도전과 시련을 받았다.

   유방은 팽성에서 패배하자 홀로 도망을 치면서 어느 민가에 들어갔다. 집주인은 유방이 한왕(漢王)이라는 말을 듣자 자기 딸을 주었는데, 그녀가 바로 척부인(戚夫人)이다. 항우를 격파한 뒤 유방은 척부인을 맞아들이더니, 점차 여후(呂后)- 여치-를 멀리하고 척부인만 총애했다.

   척희(戚姬)는 젋고 예쁜데다가 가무에도 능하고, 문장과 서예에도 어느정도 조예가 있었다. 더구난 유방을 아껴주고 아부도 잘했기 때문에 유방은 완전히 그녀에게 푹 빠져 있었다.

   유방의 사랑을 독차지한 척희는 자신의 미래를 위해서 자기가 낳은 아들 여의(如意)를 태자로 삼아달라고 여러 번 유방에게 요구하였으나, 유방은 끝까지 응낙하지 않았다. 이 일로 척희가 가끔 울고불고하자 유방의 마음도 조금씩 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태자 유영(劉盈)의 성격이 너무 나약해서 유방의 마음에 썩 들지 않았다. 하지만 여의는 총명하고 굳건한데다 그 생김새도 유방을 빼닮아서 유방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다. 결국 유방에게 유영을 폐하고 여의를 태자로 봉할 마음이 생겼으니, 그렇게 해야만 한나라의 왕실도 보존하고 총애하는 척희의 소원도 들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여후는 이미 그러한 낌새를 알아차리고 늘 전전긍긍하면서 지냈다. 하지만 유방의 몸과 마음이 전부 척희에게 쏠려 있었기 때문에 접근할 기회가 없어서 속만 태우고 있었다.

   마침 여의가 만 10세가 되었다. 관례대로 한다면, 그 역시 책봉을 받아서 영지로 가야 했다. 척희는 이 소문을 듣자 대경실색했다. 왜냐하면 일단 영지로 가게 되면 황제를 만나기 어렵게 되어서 아침저녁으로 황제를 가까이 하는 일은 전혀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자연히 감정도 멀어지게 되어서 당연히 황제의 환심을 살 수가 없었다.

   척희는 유방을 만나자마자 땅바닥에 주저앉아서 통곡하기 시작했다. 유방은 이미 그녀의 속셈을 알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말했다.

   "여의가 영지로 가야 하는 일 때문에 울고 있는 건가? 나 역시 여의를 태자로 봉하고 싶지만, 맏아들을 폐하고 둘째를 세우거나 적자를 폐하고 서자를 봉한다는 것이 아무래도 명분에 맞지 않아서 말을 꺼내기가 어려우니 좀더 기다려 보아야겠다."

   그러나 척희가 더욱 슬프게 울면서 애걸하자 유방의 마음도 조금 움직였다. 그래서 이튿날 대신들이 모인 장소에서 이 일을 의논하겠다고 응낙했다. 이튿날 아침 대신들이 모두 조회에 모이자, 유방은 태자를 폐하는 일에 관해 말을 꺼냈다. 그러자 대신들은 모두 놀라면서 태자를 봉한 지 여러 해가 되었고 또 전혀 과오를 범하지 않았는데도 아무런 이유 없이 태자를 폐한다면 천하가 어지러워질 거라고 했다. 그러나 유방은 그들의 의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조서의 초안을 담당한 관리에게 글을 작성하도록 명령했다.

   이때 어사대부 주창(周昌)이 앞으로 나서면서 단호하게 안된다고 외쳤다. 주창은 말을 더듬는 경향이 있었는데, 상황이 급하면 급할수록 말을 빨리 하지 못했다. 한참 후에야 그는 겨우 몇 마디 말을 내뱉었다.

   "신이 언변이 좋지 않지만, 이, 이, 이 일이 옳지 않다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폐하께서 태자를 폐하는 것은 절대로 불, 불, 불가합니다."

   유방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 결국 폭소를 터뜨렸고, 그 자리에 모인 대신들도 모두 소리를 내어 웃었다. 이 웃음으로 유방은 오히려 노기가 말끔히 사라지면서 다시는 조서를 작성하라고 재촉하지 않았다.

   주창이 동쪽 사랑문 앞에 이르렀는데 여후가 그곳에 서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다가가서 인사를 하려 하자, 뜻밖에 여후가 갑자기 그이 앞에 꿇어앉았다. 주창은 어찌할 바를 몰라서 덩달아 황급히 꿇어 앉았다. 여후가 얼른 그를 부축해 일으키면서 말했다.

   "오늘 만약 당신이 도리를 따지지 않았다면 태자는 벌써 폐해졌을 것이오. 내 자식의 태자 지위를 지킨 것에 감사하기 위해서 이렇게 큰 인사를 드리는 것이오."

   주창이 황망히 대답했다.

   "공적인 이유로 그렇게 말한 것이지, 개인적인 이익을 위해서 말한 것이 아닙니다. 황후께서는 너무 심려하지 마십시오."

   실제로 여후의 행위는 주창에 대한 감격의 뜻을 표현하는 것이 목적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여후가 일부러 연출한 것이기도 했다. 그녀는 이런 행동을 함으로써 대신들에게 태자를 함부로 폐해서는 안 됨을 강조한 것이다. 그러나 여후는 유방이 일시적으로 그 일을 중지하긴 했지만 시기가 되면 또다시 태자의 문제를 논할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스스로 태자의 지위를 고수할 방책이 떠오르지 않아, 장량을 끌어들여서 그로 하여금 좋은 대책을 고안하도록 했다. 장량이 말했다.

   "만약 유능하고 명성이 높은 사람들을 불러서 태자를 보좌하게 한다면, 태자가 유능하고 인심을 얻는 것처럼 보이므로 황제가 설사 폐할 마음이 있다고 해도 신중히 고려하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그렇게 되면 태자의 지위를 보전할 수 있을지도 모르죠."

   여후가 그런 유능한 인재들이 어디에 있느냐고 묻자, 장량이 이렇게 대답했다.

 

   "섬서(陝西)의 상산(商山) 일대에는 나이가 많은 네 명의 은사(隱士)가 있다고 하는데, 사람들은 그들을 '상산사호(商山四皓)라고 합니다. 황제께서 여러 차례 위임장을 보냈으나 그들은 모두 거절하였죠. 만약 그 사람들을 청할 수 만 있다면 아마 가능할 것입니다."

   여후는 즉시 사람을 보내서 그 '상산사호'를 청해오도록 했다.

   유방은 영포(英布-경포)등의 반란을 평정한 후에 심신이 너무 피로한데다 화살에 맞은 상처까지 도져서 병석에 누웠다. 척희는 밤낮으로 유방의 곁에 붙어서 시중을 들었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만약 유방이 세상을 떠나면 자기 모자의 생명을 지킬 수 있는 만반의 대책을 마련해달라고 졸랐다. 유방은 아무리 생각해도 별 다른 대책이 없는지라 다시 태자를 폐하는 문제를 꺼내게 되었다.

   장량은 태자의 소부(小傅)라서 소문을 듣자마자 즉시 유방을 찾아가 갖가지 도리를 내세워 만류하였으나 유방은 전혀 들어주지 않았다. 장량이 유방을 따른 이래로 유방은 그 계책을 거의 다 받아들였다. 그런데도 유방이 이렇게 나오자 장량은 간언의 어려움을 알고 병을 핑계로 두문불출했다.

   태자의 태부(太傅) 숙손통(淑孫通)은 그 소식을 듣고는 직접 궁내로 들어가서 이렇게 직언했다.

   "옛날 진헌공(晉獻公)이 총애하던 여희가 태자를 폐한일로 인해 진나라가 20년 동안 혼란에 빠져 있었습니다. 진시황은 부소를 미리 태자로 봉하지 않아서 진나라를 멸망으로 이끌었으니, 이 사건은 폐하도 친히 목격했던 바입니다. 여후와 폐하는 환난을 함께한 부부입니다. 자식이라고는 태자 하나뿐이고, 태자가 너그럽고 효성스럽다는 것은 천하가 다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아무런 이유도 없이 태자를 폐하려고 합니까? 만약 저의 간언을 받아들이지 않고 그래도 행한다면 저는 죽음으로 끝까지 간하겠습니다."

   말을 마친 숙손통은 즉각 검을 빼서 자살하려고 했다. 유방은 급히 그를 제지하면서 말했다.

   "나는 단지 말로만 했을 뿐이지, 진짜 그렇게 하려는 것은 아니네"

   얼마 지나지 않아 유방은 태자를 불러 함께 식사를 했는데, 사실은 그의 허실을 한번 떠보려는 것이었다.

   상산사호는 그 말을 듣자 태자를 동반하여 함께 궁궐로 들어갔다. 유방은 태자 뒤에 앉아 있는 수염과 눈썹이 백설 같은 네 노인을 보자 매우 이상한 생각이 들어서 누구냐고 물었다. 네 노인이 하나하나 자신의 성명을 말하자, 유방은 경악을 감추지 못하면서 물었다.

   "내가 몇 년 동안 당신들에게 임무를 맡기려고 했는데, 나의 초빙에는 응하지 않고 이제 내 아들과 교제하는가?"

   그러자 상산사호가 일제히 대답했다.

   "폐하께서 선비들을 얕잡아보고 멋대로 모욕하셨는데, 우리는 그런 처사를 참을 수 없기 떄문에 응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제 태자께서 마음이 어질고 선비들을 예의로 대한다고 하니, 천하의 현명한 자들이 모두 태자를 모시려고 하면서 태자를 위해 죽음까지 마다하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 몇 사람도 먼길을 마다하지 않고 특별히 찾아와서 태자를 보좌하려고 합니다."

   유방은 그들의 대답을 듣고 탄식을 그치지 않았다.

   태자와 상산사호가 떠나가자, 유방은 급히 척희를 불러서 상산사호의 뒤를 가리키며 말했다.

   "내가 여의를 태자로 봉하고 싶지 않은 것이 아니라, 태자의 깃털이 이미 풍성해져서 폐할 수가 없구나."

   척희는 유방의 말을 듣자 희망이 없음을 깨닫고 그 자리에서 기절할 듯이 몸부림쳤다. 유방도 마음이 매우 쓰려서 척희를 위해 [홍곡(鴻鵠)이 놓이 날아가네]라는 사(辭)를 높이 읊었는데, 그 소리 또한 처량하기 그지없었다.

 

   상산사호를 이용해서 태자의 명망을 높이려는 장량의 술수는 그가 독창적으로 창안한 것이 아니라, 이미 [전국책]에 연나라 소대(蘇代)가 순우곤(淳于髡)을 이용하여 제나라 왕을 설득한 예가 기록되어 있다. 소대는 백락(伯落)의 예를 들어가며 순우곤에게 제나라 왕에게 자신을 중용할 것을 권유해달라고 부탁했고, 제나라 왕은 그 말에 따라 소대를 신임하였다고 한다.

   이것은 비록 종횡가들이 지어낸 하나의 이야기에 불과하지만, 정치에서는 오히려 매우 잘 통용되는 것이었다. 여하튼 이후로 유방은 두번 다시 태자를 바꿀 생각을 하지 않았다.

   유방이 죽은 후 유영이 즉위하여 혜제(惠帝)가 되었는데, 실제로는 여후가 대권을 장악하였다. 그녀는 유씨의 세력을 배척했는데, 무엇보다도 먼저 눈엣가시처럼 여기던 척희를 냉궁(冷宮)에 집어넣었다. 여후는 척희의 삼단 같은 머리를 빡빡 밀도록 명령했다. 그리고 그녀의 머리와 목에 무쇠 고리를 두르게 하고, 왕궁의 의복대신 자홍색의 굵은 올로짠 허름한 옷으로 바꿔 입혀서 쌀 찧는 일을 시켰다. 척희는 평생 쌀을 찧어본 적이 없는지라, 가슴에 치밀어오르는 비분을 억제하지 못하고 매일 눈물 속에서 고된 나날을 보냈다.

   얼마 후 그녀는 스스로 [춘가(春歌)]를 지었는데, 바로 매일 쌀을 찧으면서 만들어낸 것이다. 그 내용은 이러했다.

 

아들은 임금이요 어미는 포로구나.

종일 쌀을 찧으며 저녁을 맞으니, 늘 죽음과 동반하는 것 같네.

서로 3천 리나 떨어졌으니, 누구를 시켜서 너에게 알리리.

 

   여후는 그 일을 알자 크게 화를 내면서 욕설을 퍼부었다.

   "비천한 계집이 아직도 감히 아들에게 기대를 걸고 있단 말이냐?"

그리하여 기원전 194년 여후는 사람을 보내서 조은왕(趙隱王) 여의를 독살하게 했다. 여후는 척희의 아들을 죽인 후로 더욱 잔인하게 척히를 박해했다. 먼저 척희의 손가락과 발가락을 모두 자르고 또 그녀의 유방을 도려냈다. 아울러 두 눈을 파내고 귀를 멀게 만들었으며, 목소리가 나지 않게 하는 약을 먹인 후에 변소에 가두었다. 여후는 척희에게 '인간돼지'라는 별명을 지어주었다.

   며칠이 지난 후 여후가 혜제를 불러서 이 광경을 보게 했는데, 혜제는 그녀가 누구인지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 그래서 옆에 있던 자가 척희라고 알려주었다. 이튿난 척희는 죽었다.

   혜제는 척희의 처참한 광경을 보고는 궁중에 들어와 울음을 그치지 못하였는데, 그 때문인지 1년 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후에 그는 여후에게 이렇게 말했다.

   "척희를 그 모양으로 만들었으니 어디 사람이 할 짓입니까? 내가 당신의 아들이지만 도저히 천하를 다스릴 수 없습니다."

   그후 한혜제는 종일토록 술과 여색에 빠져 지내면서 정무를 완전히 폐했다. 이렇게 소극적이고 퇴폐적인 날을 보내던 그는 기원전 188년에 우울하게 죽었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무기는 여자의 질투라고 했지만, 여후가 척희를 질투하여 저지른 복수는 아마 세상에서도 전무후무한 것이리라. 이는 전형적으로 중국적인 것이었다. 중국의 여인들은 천성이 특이해서 그런지 그녀들의 권모술수는 항상 잔인함과 관련을 맺고 있다. 여후는 동성의 라이벌에 대해서도 잔인하였을 뿐만 아니라 남성에게도 절대로 연약함을 보이지 않았다.

   한나라 초기, 천하가 안정을 찾기는 했지만 인심은 아직 통일되지 않았다. 특히 일부 군사 대권을 쥐고 있는 장수들이 천하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기 때문에 유방은 매우 조심하면서 지냈다. 그가 반란군 진희(陳豨)를 진압할 때도 궁중의 일은 여후에게 맡기고 궁중 밖의 일은 소하에게 위임한 후에야 비로소 마음을 놓고 떠났다. 여후는 실로 속셈이 있는 여인이었으니, 그녀는 권위를 세우고 세력 기반을 굳힐 수 있는 것이라면 사소한 기회도 놓지지 않고 앞날을 위해 토대를 닦았다.

   유방은 한신이 모반하는 것이 아닌가 의심을 했기 때문에 그의 지위를 강등시키면서 장안에 머물게 했다. 바로 이때 한신의 사인(舍人)인 난설(欒設)이 남동생을 보내서 한신이 진희와 내통하여 이미 밀약을 맺은 상태라는 보고를 올렸다. 즉, 야밤을 이용하여 감옥 문을 열어서 범죄자들을 풀어주고, 태자를 습격해서 진희와 호응하기로 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여후는 소식을 접하자 즉시 소하와 상의하여 한신을 제거하기로 했다. 여후는 심복 군졸을 유방이 보낸 군사로 위장시키기 위해서 일단 장안을 빠져나간 뒤에 다시 북쪽 장안으로 들어오게 했다. 그리고는 '진희는 이미 죽었다'는 소문을 퍼드리게 했다.

   대신들은 그 내막을 모르고 모두 조정에 나와서 축하를 했다. 여후의 본뜻은 이 기회에 한신을 궁중으로 유인하려는 것이었는데, 한신은 몸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축하하러 오지 못했다. 어쩔 수 없이 소하가 찾아가보기로 했다.

    소하가 자신의 집을 찾아오자, 한신은 마지못해 나와서 그를 영접하였다. 소하가 한신을 보고 별로 병도 없는 것 같다고 했기 때문에 한신은 어쩔 수 없이 소하를 따라서 조정에 나갔다. 하지만 그는 미처 축하를 하기도 전에 체포되었다. 한신은 사태가 좋지 않은 걸 알아채고 급히 소하를 부르면서 구원을 청했으나 소하는 이미 멀리 피한 상태였다.

   무사들이 한신을 여후의 면전으로 끌고 갔다. 여후는 난설이 보내온 서신을 증거로 한신의 모반을 꾸짖었지만, 한신은 당연히 불복했다. 그러자 여후가 말했다.

   "진희가 이미 붙잡혔다는 황제의 조서가 왔는데, 이 속에는 그대와의 밀약이 있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또 그대의 사인이 밀고한 서신도 있으니 증거가 확실하다."

   여후는 이 일을 질질 끌다가는 다른 변수가 생길까 걱정해서 한신을 즉시 참수하도록 명했다. 이리하여 공훈이 혁혁한 개국의 원로는 억울한 누명을 쓴 채 여후의 칼에 죽임을 당했다.

   소하가 한신을 발탁해서 대장이 되도록 했고 또 계략으로 그를 체포해서 죽임을 당하게 하였으니, 그야말로 '성취한 것도 소하 때문이요. 망한 것도 소하 때문이라는' 격이다. 소하의 이런 행위는 바로 그때그때의 형세에 따라서 나온 것이었다. 유방에게 인재가 필요할 때 한신을 불러들였고, 유방이 '토끼를 다 잡아서 사냥개가 필요 없게' 되고 여후가 위엄을 세울 필요가 있게 되자 한신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그러니 장수가 되는가, 아니면 귀신이 되는가 하는 것은 모두 당시의 필요에 따른 것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소하라는 위인이 정직하지 못한 인물임을 알 수 있다. 그는 단지 지모에 능하고 조심성이 많으며 시세를 잘 파악해서 화를 피하는 권모술수가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여후는 한신을 죽이고도 성이 차지 않았는지 또 구실을 만들어 양왕(梁王) 팽월(彭越)까지 죽였다. 유방이 진희의 반란을 평정할 때 양(梁)땅에서 징병한 적이 있었는데, 마침 양왕 팽월은 병으로 드러누워 있어서 미처 유방을 찾아뵙지 못했다. 유방은 크네 노하면서 팽월에게 모반의 마음이 있지 않은가 의심했는데, 마침 양태복(梁太僕)이 팽월에게 모반의 뜻이있다고 보고하자 유방은 그를 즉시 체포하게 했다. 조사와 심문을 해본 결과 팽월이 반란을 평정하는 일에 적극적인 반응을 보이지는 못했으나 모반의 마음은 없었다는 것이 판명되었다. 하지만 유방은 그를 서인(庶人)으로 낮추고 낙양의 궁중에 감금했다가 나중에 다시 촉(蜀)땅에 이주하도록 했다.

   팽월이 서쪽으로 가다가 정(鄭) 땅에 이르렀는데, 마침 장안에서 낙양으로 가던 여후를 만났다. 실로 팽월은 죽을 운명이었다. 그는 자신의 무죄를 울면서 호소하며 고향인 창읍(昌邑)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청했다. 여후는 한번 방법을 생각해보겠다고 하면서 그를 낙양으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 암암리에 사람을 시켜서 팽월이 모반하려 한다고 모함하도록 사주한 후에 그것을 구실로 팽월을 낙양성 밖에서 죽였다. 뿐만 아니라 그의 3족까지 멸해서 그 후환을 깨끗이 제거했다.

   여후가 왕후(王候)의 신분을 가진 두 공신을 죽이자, 대신들은 깜짝 놀라서 여후를 다시 보게 되었다. 여후는 그 기회를 틈타서 세력 기반을 어느 정도 구축했다. 그녀가 개국 공신들을 죽인 것은 장차 대권 장악이라는 원대한 목표를 실현하는 데 장애가 되는 인물들을 제거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행위는 동시에 그녀의 정치적 야심을 여지없이 드러냈다. 유방은 일찍이 이 점을 간파했다. 그래서 자신이 죽은 후에 유씨 정권이 무너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대신들과 백마의 피를 마시며 이러한 서약을 했다.

   "만약 유씨의 종족이 아닌 자가 왕이 된다면, 천하 사람들이 합심하여 그 자를 토벌하라!"

   유방이 죽은 후 유영이 혜제로 즉위 하였으나, 그는 너무 나약해서 국가의 대권은 사실상 여후에게 돌아갔다.

   얼마 후 유영은 여후의 작간(作奸)에 놀라서 죽었다. 여후는 이 친자식밖에 없었기 때문에 궁녀가 낳은 유공(劉恭)이라는 사내애를 왕위에 올려 놓고 그의 생모는 죽여버렸다. 이렇게 해서 여후가 직접 모든 권력을 장악하는 상황이 이루어졌다.

   여후가 통치하는 8년 동안, 그녀는 유씨 종족이 아니면 왕이 될 수 없다는 규율을 개고 여씨 일족을 대거 책봉하였다. 그리하여 여대(呂臺)를 여왕(呂王)으로, 여산(呂産)을 양왕(梁王)으로, 여록(呂祿)을 조왕(趙王)으로, 여통(呂通)을 연왕(燕王)으로, 그의 여동생 여수(呂須 - 번쾌의 처)를 임광후(臨光候)로 각각 봉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이때쯤 유씨 정권은 이미 여씨 정권으로 전락되어 있었다.

   유공은 점차 나이가 들면서 자신이 여후의 친자식이 아니란 것을 알게 되었다. 언젠가 육공이 이런 말을 했다.

   "태후가 어찌 나의 생모를 죽이고 나를 황제로 올려놓을 수 있단 말인가? 내가 장성한 후에는 반드시 복수 할 것이다."

   여후는 그 말을 듣자 즉시 그를 연금했고, 얼마 후에는 그를 폐하고 살해했다. 그 다음 왕위에 오른 항산왕(恒山王) 유홍(劉弘)은 완전히 꼭두각시 황제였다.

   기원전 180년 7월, 여후는 중병에 걸렸다. 그녀는 대신들이 자기에게 복종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며, 그래서 자기가 죽은 후에는 반드시 커다란 혼란이 일어날 것을 에감하고 있었다. 그녀는 여씨 일족에게 미리 군사적 준비를 갖추도록 하는 한편 이렇게 당부했다.

   "내가 죽은 후에 대신들이 반란을 일으킬 수 있으니, 나의 장례식으로 인해 왕궁을 비우지 말라. 다른 사람이 왕궁을 장악할 수 있기 떄문이다. 그리고 병권을 완전히 장악해서 황궁을 굳게 지켜야 한다."

   바로 그 달에 여후는 병으로 죽었다. 한나라의 개국 공신 주발(周勃)과 승상 진평(陳平) 등은 다른 장수들과 함께 여씨 이족의 혼란을 틈타서 일거에 그들을 제거하여 모조리 죽였다. 그리고 유항(劉恒)을 추대하여 한문제(漢文帝)로 삼았다. 결국 여후가 온갖 고심을 하면서 이루려고 했던 여씨 정권은 철저히 파탄이 나고 말았다.

 

여후는 황제의 명분은 갖추지 못했으나 황제의 실속은 챙겼으니, 중국 역사에서 첫 여성 황제라고 할 만하다. 그녀는 8년 동안 집정하면서 백성들에게 휴식을 주는 여러 가지 정책을 시행함으로써 어느정도 사회의 안정과 발전을 이룩했다. 이 점에서 그녀에게 일정한 업적이 있다고 보아야 할것이다.

   일반 백성에서 시작하여 황제라는 지존(至尊)의 위치까지 오른 여성은 중국에서 여후가 유일하다. 그녀의 일생을 살펴보면, 기회와 개인의 노력이 절반씩 차지하였음을 알 수 있다. 앞의 절반은 유방의 아내이자 고귀한 신분인 황후로서 다른 사람과 견줄 수 없는 우위를 말하는 것이고, 뒤의 절반은 자신의 우세함에 의지해서 장기적으로 들인 노력과 강인하고 잔인한 수단을 가리킨다. 같은 황제의 아내로서 척희는 사실상 여후보다 더 많은 우위를 점하고 있었지만, 그 우위를 이용하지 못하고 단지 유방을 조르기만 하다가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하지만 여후는 안과 밖을 아울러 공격하고 강함과 부드러움을 겸용한 수단으로 자신의 위엄을 확립해서 대신들을 제어했다.

   여후의 일생을 살펴볼 때, 성공의 비결은 사실상 교활하고 잔인한 데 있었다. 중국 봉건시대의 궁정은 아마도 도리와 도덕을 가장 무시하는 곳일 것이다. 그런 이유로 일반적인 상황에 빗대어서 조금이라도 인정을 갖게 되면 그 자리에서 패배하게 된다. 권력을 위해서는 물질, 도덕, 감정 등 어떠한 대가를 지불하는 것도 마다하지 말아야 하고 일체의 양심을 어기고 살아야 했다.

   궁정 안의 투쟁에서 권력욕과 인성(人性)이 겨루는 경우가 종종 발생하는데, 대체로 권력욕이 승리하고 인성이 패배하게 된다. 실패자의 수급을 살펴볼 때 우리는 그나마 미미한 인성을 느낄 수 있지만, 승리자의 미소를 바라볼 때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권력욕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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