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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위키디피아, 수호전 삽화 |
중국에는 이런 속담이 있다.
"어릴 때는 '수호전'을 읽지 않고, 나이가 들어서는 '삼국지'를 읽지 않는다."
말하자면 혈기왕성한 젊은 시절에 '수호전'을 읽으면 쉽게 난을 일으킬 우려가 있으며, 나이 든 사람은 연륜과 속셈이 깊은데 만약 '삼국지'까지 읽는 다면 쉽게 간교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사실 책략가라고 해서 반드시 간사한 자라고 할 수는 없다. 삼국시대의 순유가 바로 그러한 책략가이다.
순유(荀攸, 157~214)는 자(字)가 공달(公達)인데, 후한 말엽 영천(潁川) 사람이다. 그는 사족(士族)출신으로 위인이 선량하고 단정할 뿐만 아니라 지헤가 풍부했다. 순유는 어릴 적에 부모를 여의고 조부와 숙부 아래서 자라났는데, 외모는 우둔하고 나약했으나 실제로는 아주 영리하고 용감했다.
순유가 13세때에는 조부 순담(荀曇)이 죽자, 과거 그의 수하에 있던 장권(張權)이라는 관리가 스스로 찾아와서 그 분묘를 지키겠다고 자청했다. 순유는 숙부 순구(荀衢)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자는 얼굴 빛이 이상해서 아마 간교한 일을 저지를 것 같습니다."
순구는 그 말뜻을 알아차리고 그 사람에게 자세한 상황을 물었다. 과연 장권은 살인을 저질러서 도주하고 있던 중이었으며, 분묘를 지키는 일로 자신의 신분을 감추려고 했던 것이다. 이 일이 퍼지게 되자 사람들은 모두 순유를 괄목상대하게 되었다.
나중에 순유가 조정에서 황문시랑으로 있을 때 동탁이 난을 일으켰다. 순유는 동탁 암살 계획에 참여했던 일로 감옥에 갇혔다가 동탁이 제거된 후에 비로소 출옥할 수 있었다.
그는 황문시랑으로 있으면서 혼란한 세상을 안정시킬 수 있는 주인을 찾기 위해 애를 썼다. 조조는 한헌제(漢獻帝)를 맞이해서 허창(許昌)에 도읍을 정한 후에 순유가 능력 있는 사람이라는 소문을 듣고 그를 여남(汝南)태수로 임명했다가 다시 군사로 삼았다. 순유는 조조야말로 자신과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여기고 그와 함께 일을 추진했다. 조조는 순유를 얻게 되자 매우 기뻐하면서 사람들 앞에서 이렇게 치하했따.
"순유는 비상한 사람이야! 내가 그 사람과 함께 대업을 도모할 수 있으니, 이제 천하에 걱정될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
이 말에는 순유에 대한 조조의 신뢰와 칭찬이 함께 들어 있었다.
처음 조조는 순유가 유능하다는 소문을 듣자 그를 초빙하려고 했다.
그래서 순유에게 이러한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지금 천하는 일대 혼란에 빠져 있으니, 지모가 뛰어난 사람들이 입신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요! 그대는 사람 중의 용봉(龍鳳)이므로 이 기회를 놓치지 말고 포부를 펴야 하오. 하지만 아직 형주(荊州)에서 관망만 하고 있으니, 너무 많은 기회를 놓치고 있는 것이 아니오?"
순유는 조조가 자신을 인재로 간주하자 곧장 조조를 찾아가서 상서(尙書)가 되었다.
역사의 기록에 의하면, 조조는 많은 책사를 두고 있었지만 그 중에서 가장 공로가 큰 책사는 순유였다. 조조를 보좌하는 과정에서 순유는 12차례나 큰 공로를 세웠는데, 모두 조조의 군사로 하여금 위험한 상황에서 살아나게 하거나 기술(奇術)로 승리를 거두헤 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순유는 조조가 모든 일을 상의하는 책사가 되었다.
건안 3년(198년) 순유는 조조를 따라서 장수(張繡)를 정벌하러 나섰다. 순유는 당시의 형세가 조조에게 아주 불리한 것을 보자 이렇게 말했다.
"장수는 유표(劉表)와 연합하여 우리와 맞서고 있습니다. 그들은 서로 호각지세를 이루고 있죠. 그러나 장수의 군대는 유표의 보급에 의지하고 있기 때문에 얼마 지나지 않아 유표는 점차 지탱하기 어렵게 될 것이며, 그렇게 되면 두 사람은 필연적으로 갈라설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성급히 공격하지 말고 관망하면서 그 변화를 지켜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적들을 유인해서 스스로 멸망의 길로 치닫게 할 수 있지만, 반대로 성급하게 공격을 한다면 유표가 반드시 결사적으로 지원할 것이니 아군은 쉽게 성공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궁지에 몰릴 위험이 있습니다."
그러나 조조는 그의 권고를 듣지 않고 직접 장수와 전투를 시작했다. 과연 유표가 군대를 보내서 지원하자, 조조의 군대는 손해를 보았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조조 역시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 후에 조조는 이 일을 후회하면서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게 모두 순유의 말을 듣지 않은 결과이다!"
얼마 후 조조는 적군을 유인하는 계책을 사용하고 나서야 비로소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이때부터 조조는 순유의 계책이라면 반드시 채택했을 뿐만 아니라 결코 경솔하게 그의 의견을 거부하지 않았다.
건안5년(200년), 조조와 원소 사이에 유명한 관도(官渡) 전투의 서막이 올랐다. 이는 조조의 운명을 결정하는 전투였다. 2월, 원소는 먼저 대장 안량(顔良)을 보내서 백마(白馬)를 포위했다. 4월, 조조는 친히 군대를 거느리고 포위된 백마를 구하러 떠났다. 군사들이 행군 중에 있을 때 순유는 아군보다 훨씬 강대한 적군과 정면으로 충돌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당시의 형세를 분석하여 '동쪽을 치는 척하면서 서쪽을 공격하는' 성동격서(聲東擊西)의 전술로 백마의 포위를 구하겠다는 방안을 세웠다.
순유는 일단 수적으로 우세한 원소의 병력을 분산시켜야겠다고 생각했기 떄문에 조조에게 먼전 연진(延津)으로 가서 강을 건너 원소의 후방을 공격하는 것처럼 꾸미게 했다. 그렇게 되면 원소가 군사를 나누어서 서쪽으로 보낼 터인데, 그때 다시 가벼운 장비로 무장한 정예군을 보내서 백마를 포위하고 있는 원소의 군대를 공격하면 안량을 격파 할 수 있다고 보았다.
조조는 그의 계책을 듣자 그대로 진행하도록 했다. 과연 원소는 군사를 나누어서 연진으로 보냈으며, 조조는 그 기회를 틈타서 가벼운 기병을 보내어 연진을 습격했다. 결국 아무런 준비도 없던 안량은 관우에게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조조는 백마의 포위망을 격파 한 후에 기병 600명을 이끌고 강을 따라 서쪽으로 퇴각했다. 그러나 얼마 가지 못해서 5,6천명에 달하는 원소의 추격병과 조우했는데, 장병들은 적군과의 역량 차이가 너무 현저한 것을 보자 모두 겁을 먹고 있었다. 그러나 순유는 적들의 약점을 파악하고 있었던 지라 이렇게 말했다.
"지금이야말로 적군을 격파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그런데 왜 퇴각하려 합니까?"
조조는 순유와 마주보며 웃었다. 그들이 생각하는 바가 같았던 것이었다. 조조는 군사들에게 말안장을 떼어서 말을 풀어놓고 장비들을 곳곳에 어지럽게 던지게 했다. 바로 원소의 군대를 유인하려는 것이었다. 원소의 군대가 가까이 오자 그들은 길에 널려 있는 장비들을 곳곳에 어지럽게 던지게 했다. 바로 원소의 군대를 유인하려는 것이었다. 원소의 군대가 가까이 오자 그들은 길에 널려있는 장비들을 서로 가지려고 다투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때 조조는 맹렬한 공격을 가해서 원소의 군대를 크게 대하하고 대장 문추(文醜)를 사로잡았다.
원소의 두 대장은 전사했고, 조조는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어서 그후의 발전을 위한 든든한 기반을 닦았다.
당시 원소의 군대는 매우 강해서 조조의 군대보다 절대적인 우세를 확보하고 있었다. 그러난 원소는 결단력이 약하고 군사를 효율적으로 지휘하지 못했다. 특히 원소의 책사인 허유(許攸)가 원소의 억압에 화가 나서 조조에게 귀순했는데, 그는 원소의 군량과 그밖의 군수물자가 모두 오소(烏巢)에 집결되어 있으니 그곳에 불을 지르면 원소는 3일도 지나지 않아서 큰 혼란에 빠질 거라고 했다. 이 계책은 아주 절묘해서 순유도 구상은 하고 있었지만 원소의 허실을 몰라서 경솔히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순유는 허유의 말대로 오소를 습격하자고 제안했으며, 조조는 직접 군사를 이끌고서 오소의 진영을 크게 격파했으니, 이로써 중국 역사에서 유명한 관도의 전투는 첫 시작부터 조조의 승전으로 그 막을 열었다.
원소는 오소의 군량이 모두 불에 타버리자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이때 순유가 조조에게 말했다.
"지금 승리의 여세를 몰아서 추격할 수 있습니다. 먼저 가짜 소문을 퍼뜨려서 아군이 군사를 돌렸다고 하면서 한쪽으로는 산조(酸棗)와 업군(鄴郡)을 공격하는 것처럼 위장하고, 다른 한쪽으로는 여양(黎陽)을 공격하는 거처럼 행동함으로써 마치 원소의 퇴로를 차단하려는 것처럼 보이게 합니다. 원소는 이 소문을 들으면 워낙 의심 많은 성격이라서 필경 가짜로 진짜로 여기고서 군사를 분산시켜 아군을 공격할 것입니다. 그가 군사를 움직이는 틈을 타서 그의 군영을 기습한다면, 원소의 군대는 이미 투지가 떨어진 상태라 반드시 쉽게 격파할 수 있을 겁니다."
조조는 순유의 말을 옳다고 생각해서 즉시 그의 계책에 따라 즉시 군사를 세갈래로 나누었다. 그리고 도처에 소문을 퍼뜨려서 원소를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원소의 수하들은 그 떠도는 소문을 듣고 이렇게 전했다.
"조조는 군사를 두 갈래로 나누어서 하나는 업군으로 진군하고, 하나는 여양을 공격하려고 합니다."
원소는 그의 정보를 그대로 믿고서 즉시 10만 대군을 급파하여 업군과 여양을 지원하게 했다. 조조는 즉시 많은 병력을 집중해서 그 허점을 노리고 원소의 군영을 기습했다. 원소의 군대는 싸울 마음도 없었기 때문에 군사들이 사방으로 흩어져서 전혀 저항할 여지가 없었다. 원소는 갑옷, 투구도 입지 못한 채 어린 자식 원상(袁尙)을 데리고 황급히 도망을 쳤으며, 조조의 군사는 그 뒤를 바짝 추격했다. 원소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금은, 재물, 도서, 수레 등을 모두 버리고 단지 기병 800여명만을 데리고 여양으로 도망했다. 마침내 이 전투에서도 조조의 군대는 전면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조조가 여포를 토벌할 때도 순유는 군사를 따라 나섰다. 여포는 조조의 군대와 유비 등이 협공을 하자 하비(下邳)에 움츠리고 있었다. 조조의 군대는 여러 차례 공격을 감행했으나 여포의 성곽을 공략할 수 없었다. 결국 군대가 어느 정도 피로해지자, 조조는 군사를 거두어서 완성(宛城)으로 돌아갈 마음을 먹었다. 그러나 순유는 단호히 반대하며 조조에게 이렇게 권했다.
"여포는 비록 용맹하지만 지모가 없습니다. 이제 그는 세 번 싸워서 세 번 모두 패했기 떄문에 사기가 현저히 떨어져 있는 상태입니다. 비록 성곽을 지키고는 있지만 군사들은 이미 아무런 투지도 없으니, 만약 좀더 기다린다면 적군은 스스로 허물어 질 것입니다. 여포의 수하에 비록 진궁과 같은 책사가 있다고 하지만, 계책에 대한 구상이 늦기 때문에 형세의 변화에 맞추지 못하는 실정입니다. 지금 여포의 예기가 회복되지 못하고 진궁의 계책이 아직 확정되지 않은 이 틈을 타서 바짝 공격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면 여포를 반드시 격파 할 수 있습니다."
조조는 일리가 있다고 여기면서 순유에게 다시 물었다.
"어떤 좋은 방법이라도 있고?"
순유는 다음과 같은 방안을 제시했다.
"먼저 성벽을 파괴하고 나서 일거에 공격을 개시하면 됩니다."
이리하여 조조는 군사를 지휘하여 기수(沂水)와 사수(泗水)의 물을 하비성에 들이대었다. 강물의 물살이 성벽을 파괴하자, 여포의 군대는 싸움도 하지 않고 그대로 대패했다. 여포는 이 전투에서 생포되어 처형을 당했다.
전투가 끝난 후에 조조는 자신이 완전히 순유의 계책에 따라 성공을 거두었다고 생각해서 연신 순유를 치하했다.
"설사 안자(顔字)나 영무자(寧武字)와 같은 옛날 성현들이 있었을지라도 이 정도에 불과했을 것이다!"
원소가 죽은 후에 그의 몇몇 아들은 사욕으로 인해 서로 다투게 되었다. 건안7년(202년) 순유는 조조를 따라서 원담(袁譚)과 원상에 대한 공격에 참여해서 여양으로 갔다. 이듬해 조조는 또 유표를 공격했는데, 바로 이때 원담, 원상 두 형제 사이에 익주를 두고 내분이 일어났다. 동생을 이기기 위해서 원담은 조조에게 귀순을 조건으로 자신을 지지해 달라고 제안했다. 조조는 책사와 대신들을 모아놓고 이 일을 의논하게 했는데, 대부분의 의견은 먼저 유표를 격파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했다. 그리고 원담, 원상은 단합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늘 서로 다투고 있으며, 또 지모에도 능하지 않은데다가 장수나 책사의 보좌도 없으니 크게 우려할 바가 아니라고 했다. 그러나 순유만은 그들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유표 부자는 마치 돼지나 개처럼 스스로의 문 앞만 지키려고 할 뿐이지 천하를 정복하겠다는 포부는 품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천하가 혼란에 빠져서 할 일도 많은 시점인데, 어찌하여 떡 버티고 가만히 있겠습니까. 원소는 과거에 4주(州)를 점령하고 정예군 10만명을 보유한 적이 있기 때문에 그 기반이 아주 탄탄할 뿐만 아니라 오랫동안 통치한 지역에서는 민심도 그들에게 쏠리고 있습니다. 지금 그 들 두 형제가 서로 다투고 있으니, 이때야말로 우리가 그들을 격파할 절호의 기회입니다. 만약 우리가 원담의 투항을 거절해서 그를 궁지로 몬다면, 그는 다시 동생과 화해해서 부친의 사업을 이어갈 것이니 천하는 다시 고난에 빠질 것입니다.
이제 그들 형제가 상잔(相殘)하고 양립할 수 없을 터인데, 한쪽이 다른 한쪽을 겸병한다면 그 세력이 그만큼 커지게 되어서 쉽게 대처할 수가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마땅히 그들 내부 분쟁의 기회를 틈타서 그들을 공격하여 천하를 평정해야 합니다. 결코 이 기회를 그냥 놓쳐서는 안됩니다."
조조는 그의 말을 듣자 앞이 확 열리는 것을 느꼈다.
"좋소, 그대의 의견대로 해봅시다."
조조는 순유의 의견대로 원담의 요구에 응해서 군사를 보내 원상을 패배시켰다. 원상이 멸망한 후에 과연 순유의 추측대로 원담은 즉시 조조를 배반했다. 하지만 그의 세력은 이미 크게 약화되었기 때문에 순유와 조조는 남피(南皮)에서 원담을 죽였다. 익주를 평정한 후에 조조는 황제에 올리는 상서에서 이렇게 순유의 공로를 치하했다.
"군사(軍師) 순유는 신을 보좌하면서부터 모든 전투에서 반드시 수행했으며, 신이 여러 강적을 격파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순유의 계책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조정에서는 순유를 능수정후(陵樹停侯)로 임명했으며, 나중에 조조는 위나를 건립한 후에 순유를 상서령(尙書令)으로 임명했다.
조조는 순유를 중시했을 뿐만 아니라 그에 대해 높은 평가를 아끼지 않았다. 게다가 순유를 단지 지모가 출중한 사람일 뿐만 아니라 아주 충성스러운 자로 생각했다. 그래서 조조는 자신의 아들을 순유에게 부탁하기도 했는데, 그의 아들 조비에게 이렇게 충고했다.
"순유는 인간으로서 모범이 되는 사람이다. 그러니 너는 예를 갖추어서 그를 깍듯이 대해야 한다."
조비는 조조의 말을 명심해서 순유가 병상에 있을 때도 그 앞에 꿇어앉아서 문안을 드리는 등 마치 부친을 대하듯 그를 존경했다.
건안12년(207년) 순유는 중군사(中軍師)가 되었고, 위나라가 갓 건립되자 다시 상서령이 되었다. 건안 19년(214년) 순유는 조조를 따라서 손권을 공격하러 나섰는데, 그 원정길에서 병 때문에 68세의 나이로 일생을 마쳤다.
흔히 책략가는 마치 조조처럼 흰 얼굴을 한 악당으로 간주된다. 하지만 역사의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진정한 책략가는 어느 누구나 자신의 도덕적 수양을 쌓는 것 부터 시작하며, 그렇게 때문에 지모는 자연발생적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물론 본질적으로 말하자면, 이러한 지모는 단순히 일반적인 의미의 지모가 아니라 도덕적인 인격이 되는 것이다.
실제로 책략의 깊은 본질은 바로 인격이니, 구체적인 인격을 떠난 소위 기술적인 '계략'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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